1940년대 초 이육사가 외우(畏友) 신석초에게 그려준 묵란도 한 점이 있다. 가로 33.8㎝, 세로 24.2㎝의 이 그림에는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 난잎새가 뻗어가고 있고, 왼쪽 하단부에 가로로 '육사(陸史)', 오른쪽 상단부에 '의의가패(依依可佩)'라는 글자가 있다. 후일 서라벌예대 문창과에서 오래 '시경'을 가르친 한학자 신석초는, 친구의 마음을 넉넉히 품어오다 그림을 k교수에게 전했다. '의의'는 의태어로 '하늘거리는 모양'인데, 출전은 '시경' 소아(小雅)의 '채미(采薇)' 편이다. '가까이 하다'라는 뜻을 가진 '가패'는 굴원의 '이소(離騷)'에 연원을 둔다. 굳이 퇴계의 14대손인 이육사의 한학 실력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의의가패'는 곧게 뻗은 난초를 곁에 두고 난향을 풍기고 싶은 그의 내적 지향을 알 수 있게 한다.
마흔의 나이에 절명한 이육사는 열일곱 번이나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 적의 심장부인 일본은 물론 반도와 대륙을 오가며 항일운동에 투신했던 육사에게 미행과 도피, 피검과 투옥은 일상이었다. 이는 필명에서도 드러난다. 본명이 이원록인 그는 필명이 첫 번째 옥살이에서 받은 수인번호를 따서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에서 출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의 '육사(戮史)', 식민지 세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기를 먹어 설사를 한다'는 육사(肉瀉), 다시 '육사(戮史)'의 전투적인 의미를 지우고 대륙적 풍모가 느껴지는 '육사(陸史)'로 변모한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는 항상 역사의 최전선에 있었다. 늘 수배 중이었고, 소리 없이 국내에 잠입하고 대륙으로 떠났다. 검속을 대비해 다른 신분증을 썼고 변장술로 적을 따돌렸다. 거칠게 말하면 이육사는 대부분 도망자 신세였다.
문제는 늘 도망을 다니다시피한 그가 어떻게 그렇게 뚜렷하고 개결한 명편들을 남길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는 여타 참여 문인들과의 뚜렷한 차이다, 무엇보다 "온갖 고독이나 비애를 맛볼지라도 시 한 편만 부끄럽지 않게 쓰면 될 것을, 그래 이것이 무에겠소"('계절의 오행')라는 구절을 보라. 그는 문학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존경해마지 않던 루쉰에 대한 말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루쉰 추도문')는 평도 이런 맥락이다.
그는 골방 안에서도 황혼의 품 안에 안긴,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달라는 웅장한 스케일('황혼')을 보여주었고, 청포도 알알에 "먼 데 하늘이 꿈꾸며 들어와 박"히는('청포도') 돌올한 미학을 성취할 수 있었다. 북방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서 "강철로 된 무지개"('절정')를 상상할 때도 그는 정치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옥사하기 전 마지막 작품이, 우리 시사에서 드물게 시공간이 무한히 확장되는 경이를 가진 '광야'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영혼의 깊은 울림을 통해 항구적으로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관이며, 그가 생각하는 문학과 정치의 관계이다. 검열 전쟁 속 그려진 난초 그림은 이런 점에서 그의 시, 나아가 시의 아우라다. 육사의 '난향'이 오늘의 문인들에게 말한다, 혁명의 명분을 품고 있는 문인조차도 섣부른 작품은 금물이라고. 문인에게는 글쓰기가 무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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