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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현장] 필수 의료 붕괴, 당장 특단의 대책 내놔야

허현정 매일신문 사회부 기자

허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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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업의 A부서. 근무 시간이 대체로 정해져 있고, 긴급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적어 워라밸 실현이 가능하다. 부서 근무 경험을 살려 1인 회사를 차리기에 용이하고, 개업을 하면 큰돈을 벌 가능성이 높다.

반면 B부서. 한밤중이나 새벽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긴급 상황이 발생해 신경을 늘 곤두세워야 한다. 한 달에 며칠은 반드시 회사에서 지내야 하고 업무 특성상 1인 회사를 차리기 어렵다. B부서는 기업 내 반드시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수익성은 낮아 사내에서 '돈 까먹는 부서'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최근 수련병원 내 진료과목들이 처한 상황을 일반 기업에 빗댄 것이다. 입사한 젊은 직원들이 어느 부서에 대거 몰릴지는 분명하다.

이달 초 실시된 2023년도 전공의(레지던트) 모집에서 각 수련병원들은 전공의를 한 명이라도 더 모집하려고 각종 혜택을 마련했다.

숙소 리모델링에서부터 특별수당 지급, 당직 횟수 제한 등 수련 환경 개선에 힘썼다. 특히 수년간 지원자가 저조했던 일부 과에서는 입원 전담 전문의 등을 채용해 전공의들의 업무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수입, 근무 환경 등에 따라 인기 과와 기피 과가 극명하게 갈렸다.

특히 소아청소년과 지원율은 사상 최저(15.9%)를 기록했다. 대구에서는 수련병원 5곳에서 모두 15명의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를 모집했지만 지원자는 전무했다.

인천에 있는 상급종합병원인 가천대 길병원은 내년 2월까지 소아 입원 진료를 한시적으로 중단할 계획이다. 당장 내년 후반기부터 대구의 한 수련병원도 소아 병동 축소를 검토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전공의 지원율이 급감한 여파가 의료 공백으로 현실화한 것이다.

의료계에서는 특정 진료과에만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분명한데도, 정부가 그간 뚜렷한 개선 방안은 내놓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들은 수년 전부터 저출산 및 저수가 여파가 소아청소년과 지원율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전공 과목 선택은 자신이 의사로서 그 분야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먹고살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일이다"며 "수련 과정을 4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고, 전공의 특별수당을 준다거나 업무 부담을 조금 줄여준다고 그 과에 대거 지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공의 공백으로 벼랑 끝에 몰린 지역 수련병원들은 전문의를 채용해 어떻게든 의료 공백을 메우려고 하지만, 한계에 이르렀다고 호소한다.

한 병원 관계자는 "소아응급 전문의의 경우 병원 입장에서는 채용하면 적자가 뻔하기 때문에 괜찮은 처우를 보장하기 어려워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며 "병원에 수익을 가져다주기 어려운 필수 의료 분야에서 24시간 응급의료 체계를 유지하려면 의료진 확보를 위한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가 귀해진 지역 수련병원들은 대구시 차원에서 중증 및 경증 소아 환자를 공백 없이 전담할 병원을 요일별로 지정해, 전문의 채용을 위한 비용을 지원해 주길 희망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 후진국형 아이들의 사망 사례, 치명적인 장애 사례가 대거 발생할 것이라고 본다. 어린이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일어난 사고가 이슈가 된 후에야 대책이 나올 것인가"라는 의료계의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당장 머리를 맞대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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