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용삼의 근대사] 일제 치하 가짜 유공자들

물밑에서 조국 뒤엎을 짓 꾸며도 '독립운동가' 됐다
조국 독립과 아무 관련 없어도… 인우보증·날조·왜곡 통해 등재
韓 최초 볼셰비키 김 알렉산드라, 공산정당 창당시켰는데 '애국장'
국가 독립 아닌 계급투쟁 했을 뿐…공산주의 실현에 힘쓴 이도 '훈장'

김 알렉산드라가 외무인민위원으로 활동했던 극동인민위원회 건물 (하바롭스크 소재).
김 알렉산드라가 외무인민위원으로 활동했던 극동인민위원회 건물 (하바롭스크 소재).

우리 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친일과 반일이다. 어떤 인물이 친일로 낙인찍히면 폐족을 면치 못하게 된다. 반대로 아무리 하찮은 인물이어도 반일의 근거가 밝혀지면, 특히 일제에 무기를 들고 항거한 사실이 알려지면 단숨에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된다. 당사자에게 월계관이 씌워지는 것은 물론이요, 보훈처 심사에서 독립 유공자로 인정되면 후손에게 국민 세금으로 매달 두둑한 생활지원금과 보훈 혜택이 제공된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제 치하에서 너도나도 독립운동을 했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공산주의·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도 독립 유공자로 공인하는 바람에 독립운동 진영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런데 일제 시절 만주·연해주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를 문서나 기록 등으로 증빙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여기서 착안된 발상이 인우보증(隣友保証)이었다. 인우보증이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 특정 사실에 대하여 틀림이 없음을 증명'해주는 제도다. 즉, 특정인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서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제삼자가 "내가 저 사람 독립 운동하는 것을 보았노라", 혹은 "저 사람이 독립운동 했다는 사실을 누구누구에게 들었노라"라고 증언하면 독립 유공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고인이 된 김원웅 전 광복회장 부모의 가짜 독립운동에 대한 문제제기 사례로 볼 때 인우보증을 통해 다수의 인사들이 독립 유공자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솔직히 말하면 '카더라' 통신을 근거로 가짜 독립 유공자가 양산되어 후손들이 혜택을 받는 사례가 속출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 김 알렉산드라.
대한민국 정부가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 김 알렉산드라.

이 밖에도 조국의 독립과는 하등 관련 없는 행위를 한 사람을 마치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것처럼 날조·왜곡·과장·확대 해석하여 독립 유공자로 등재된 사례도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 알렉산드라(본명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다.

독립 유공자 공훈록 18권(2010년 발간)에 의하면 이 여성의 본적은 러시아 연해주 수이푼(秋風) 영안평(永安坪)이다. 아버지는 함경도 경원 출신의 김두서로 알려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으로 활동했고, 아버지의 러시아 친구였던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1914년 이혼했다. 1914년 말부터 우랄 지방의 뻬름스크 벌목장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중 공산주의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예카테린부르크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지부에서 공산주의 이론과 혁명 투쟁 교육을 받고 1917년 볼셰비키당에 입당,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가 되었다. 러시아에서 적백 내전이 발발하자 볼셰비키당은 극동 지역에 공산정권 수립을 위해 김 알렉산드라를 하바롭스크에 파견했다. 그녀는 1918년 1월 하바롭스크에 설립된 극동인민위원회의 외교인민위원에 임명되어 공산정권 설립을 위해 열렬하게 활동했다. 덕분에 '하바롭스크의 영웅', '자랑스러운 조선 인민의 딸'로 불렸다.

김 알렉산드라의 지원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사회주의(사실은 공산주의) 정당을 창당한 이동휘.
김 알렉산드라의 지원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사회주의(사실은 공산주의) 정당을 창당한 이동휘.

김 알렉산드라는 당의 지령을 받아 독일 간첩 혐의로 아무르주의 알렉세예프스키(자유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동휘 석방 공작에 나섰다. 이동휘는 감옥에서 러시아어를 배워 『공산당 선언』, 레닌의 『유물론 및 경험비판론』을 탐독했고,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애독자가 되었다. 이동휘는 감옥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인물이다(김방, 『이동휘 연구』, 국학자료원, 2015, 131쪽).

볼셰비키 당은 시베리아 일대의 조선인을 포섭하여 적군을 공격하는 백군(제정러시아 추종 세력) 및 그들을 후원하는 연합군(미·영·일·중 등)과의 전투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동휘 석방을 지시한 것이다. 김 알렉산드라는 이동휘를 석방시킨 후 조선인 공산 정당 수립을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했다.

이동휘는 김 알렉산드라의 지원을 받아 1918년 5월 10일, 하바롭스크의 볼셰비키 당사에서 한국인 최초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고 위원장에 올랐다. 한인사회당은 창당대회에서 사회주의 국가 조직을 목표로 삼았으며, 일체의 계급을 타파하고 토지와 일체의 생산시설 국유화를 표방했다. 명칭은 한인사회당이지만, 명백히 공산사회 실현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이동휘는 조선인 노동자·농민을 모아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러시아 적군 편에 서서 백군 세력과 맞서 싸웠다. 적백 내전이 격화되어 교통의 요지인 하바롭스크가 백군의 공격받았다. 볼셰비키당 지도부는 하바롭스크가 함락되기 전날인 1918년 9월 3일, 아무르강을 따라 블라고베셴스크로 탈출하기 위해 기선에 올랐다. 이때 선장이 강변에 기선을 정박시키고 도주하는 바람에 당 지도부 전원이 백군에 체포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도 체포되어 9월 16일, 하바롭스크의 '죽음의 협곡'에서 총살당했다. 처형 직전 그녀는 "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피압박 민족의 권력인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싸워왔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같이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때 국가의 자유와 독립이 얻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외쳤다.

레닌은 기회가 날 때마다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을 지원하겠다고 외쳤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염원하던 조선의 인텔리들은 이 말에 감동하여 공산주의와 손을 잡았다. 그런데 레닌이 말한 피압박 약소민족 해방은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조선의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회가 날 때마다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레닌. 그의 말에 감동한 조선의 인텔리들은 공산주의와 손을 잡았다.
기회가 날 때마다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레닌. 그의 말에 감동한 조선의 인텔리들은 공산주의와 손을 잡았다.

레닌은 계급 해방을 말했을 뿐, 부르주아 국가의 독립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공산주의가 실현되면 국가는 소멸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식민지 국가의 운동가들은 곧 소멸하게 될 국가의 독립이 아니라 계급 해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지수, 「전쟁의 기원: 역사적인 접근」, 김영호 외 지음, 『푸틴의 야망과 좌절』, ㈜글통, 2022, 26~27쪽).

공산주의자들은 '국가'는 인민(민중)을 착취하는 도구라면서 혐오했다. 그러한 '국가'의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투쟁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환상이다. 김 알렉산드라의 사례처럼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그들의 행위는 '조국 독립'을 빙자한 계급투쟁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여 러시아 공산화를 위해 투쟁한 이 여성에게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인사회당이란 공산당 조직을 창당시켜 공산주의를 퍼뜨린 것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훈장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행위였다는 뜻일까?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