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강 방어선 전투] <6·끝>학도병들이 목숨 걸고 성공한 '장사상륙작전'

6일간의 참혹한 전투…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초석·한국군 북진 계기 만들어내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에 재현한 상륙 당시 모습. 빗발치는 적의 포탄속에 좌초된 문산호에서 학도병들이 밧줄에 의지한 채 뭍으로 상륙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에 재현한 상륙 당시 모습. 빗발치는 적의 포탄속에 좌초된 문산호에서 학도병들이 밧줄에 의지한 채 뭍으로 상륙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139명 사망, 92명 부상, 행방불명 다수.'

1950년 9월 19일 오후 3시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앞바다에서 상륙함 '조치원호'의 철수작전이 끝난 뒤 미군과 한국군은 배에 탄 학도병들의 머리수를 셌다.

학도병들은 대다수 큰 부상으로 신음했다. 살았다는 기쁨은 사치였다. 너무 빨리 끝난 철수 작전 탓에 눈앞에서 30여 명의 전우들이 배에 타지 못한 채 적의 총탄에 쓰려져갔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타고왔던 전차상륙함 '문산호'는 좌초된 상태로 적의 포격을 받아 점차 바다로 사라지고 있었다.

학도병들은 대부분 14~17세로 구성된 소년들로 2주간의 짧은 훈련만 받고서 전투에 투입됐다. 전투에 대한 설명은 극비라는 이유로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극비 작전…도착해보니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학도병들은 9월 13일 오후 2시 부산항에서 문산호에 올랐다. 유격대원 772명과 지원요원 56명이 이들과 함께 배에 탔다. 이들의 부대에는 육군본부 직할 제1유격대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배는 14일 오전 4시 30분쯤 어느 해안에 다다랐다. 배는 파도에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뱃멀미가 심한 이들은 구토까지 했다. 높은 파도는 태풍 '케지아' 때문이라는 말이 들렸다.

심하게 흔들리던 배는 '쿵'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장교와 간부들이 다급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장교와 간부들은 배가 모래에 박혀 움직일 수 없다는 내용을 상부에 긴급하게 전달했다.

내용인 즉, 육지까지는 30m 남짓 남았고 문산호 방향으로 북한군의 포탄이 쉴 새 없이 날아와 박힌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두려웠지만 가족과 국가를 위해 선택한 길이라고 각오를 다잡고 또 다잡았다.

이윽고 지휘관의 지시가 내려졌다. 특공대 7명을 선발 조직해 상륙작전을 펼친다는 계획이었다. 특공대가 해안 소나무와 문산호를 밧줄로 연결하자 부대원들이 줄지어 육지를 향해 돌격했다.

이후는 까마득해졌다. 핏빛으로 바다가 물든 것인지 노을이 바다에 비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문산호는 북한군의 집중포화에 휘청이다 암초를 들이받고 좌초하기 시작해 퇴로도 사라졌다.

수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대대는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북한군의 방어선을 뒤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적도 적이지만 문산호에 있던 3일 치 식량과 많은 양의 탄약, 통신장비 등이 바다에 묻혀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식량과 탄약 보급도 없이 고립된 상황에서 대원들은 다른 부대가 구하러 와주길 희망하며 버티는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나 수세에 몰려있던 한국군은 육로로 이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

북한군은 포항지구에 있던 정예부대 2개 연대와 전차 4대를 차출해 이들을 공격하도록 하는 등 매일 같이 유격대대를 압박했고, 17일 오전 5시쯤에도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유격대대장은 병력을 뒤로 물리는 작전을 폈다. 마지막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육지에 남겨두고 지휘소는 문산호로 옮겼다. 모든 작전이 실패할 경우 대원들을 문산호에 다시 태운다는 복잡한 계산이 여기에 깔려 있었다.

18일 오전 북한군은 예상대로 공격을 감행해 왔다. 한국군은 도로를 따라 이동해가며 북한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던 중 이들에 대한 구출작전을 고심하던 미 해군과 육군본부와 극적으로 연락이 닿았다. 당시 전시 상황에서 육로 구출은 철회, 장사리 해안에서 해상으로 철수하는 작전이 긴급하게 전개됐다.

그 사이 북한군은 해안가를 점령해 유격대대의 철수작전을 가로막았다.

더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이들에 대해 해상 구조작전을 펼치려 수차례 시도했지만 기상 악화 등으로 상륙함을 육지에 대지 못하는 문제 등이 발생했다.

영덕 장사해수욕장에 위치한 문산호 전시관.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영덕 장사해수욕장에 위치한 문산호 전시관.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이에 상륙작전 때처럼 육지와 상륙함에 줄을 매단 뒤 대원들이 이를 잡고 철수하는 위험하고 어려운 작전을 시행했다.

이 작전에서 문제는 더 있었다. 작전에 투입된 조치원호 지휘관인 해군 장교와 민간인 선장 등이 상륙작전 지원 경험이 제대로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미군 장교는 우물쭈물하는 해군 장교를 대신해 철수 작전을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공군은 북한군의 화력을 저지했고 미군 함정도 포격 지원으로 작전에 힘을 보탰다.

작전 목표시간은 정오까지였다. 그러나 배에 타지 못한 대원 60여 명이 아직 육지에서 대기 중이거나 줄을 잡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배에선 북한군의 총탄에 겁을 먹고 빨리 벗어나려는 민간인 선장과 이를 저지하려는 유격대대장 이명흠 대위가 대립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오후 1시가 되면서 바닷물이 썰물로 바뀌자 미군 장교도 더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해 30여 명의 대원들을 적지에 남겨둔 채 철수작전을 끝냈다. 남은 이들은 장렬히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오랜 시간 감춰졌던 '장사상륙작전'

'작전명령 174호' 장사상륙작전은 사실상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작전이었다.

어린 학도병들을 전투에 투입시키면서도 훈련기간은 2주 정도에 불과했고, 상륙함에 실은 식량의 양도 턱없이 적었다. 작전에 투입된 문산호도 폐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대규모 상륙 작전의 성공이 절실했던 한국군의 지휘부는 학도병들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작전을 강행해야 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다른 곳에서 상륙작전을 펴 북한군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한국군에겐 이 작전의 성공이 간절했다.

이 작전이 논의될 당시는 한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북한군과 치열하게 대치하던 때로, 영덕 장사리와 가까운 포항에선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이 한국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어느 작전지역에서도 부대를 뺄 수 없던 한국군 지휘부는 어린 소년들로 구성된 학도병 투입이라는 수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작전이 극비리에 수행되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작전 내용이나 참가 부대원의 이름도 없이 작전명만 남은 채 비밀에 부쳐진 것은 이런 부끄러운 결정 때문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증거 없이 증언만 있던 이 작전이 세상에 조명을 받은 건 1997년이다. 당시 장사리 해변에서 상륙작전 참전 생존 영웅들이 참여한 '문산호'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여기서 문산호의 유해가 발굴돼 이 작전이 실존했던 것으로 증명되면서 영웅들의 이야기가 재조명됐다.

◆'성동격서' 교본 장사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장사리에서 학도병들이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을 당시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졌다.

북한군은 연합군이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벌일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여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영덕 장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 때문이었다.

서해 인천상륙작전보다 하루 앞서 정반대 편 동해에 있는 장사 해변을 공격하면서 북한군은 뒤늦게 한국군과 연합군의 의도를 의심하게 됐고, 결국 병력 운용의 실수로 인천상륙작전을 허용했다.

맥아더 장군의 예상대로 이 작전의 성공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놨다.

허리가 끊긴 북한군은 보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전투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후 들려오는 것은 전투 패배 소식밖에 없었다. 한국군은 여세를 몰아 북한군을 소탕해 나갔다.

어린 학도병들은 장사리에서 인천상륙작전 전 북한군의 주의를 흩트리고, 낙동강 방어선 형산강 전투에서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시켰으며, 마지막에는 한국군의 북진을 가능케 했다.

한국군은 9월 22일 포항을 탈환한데 이어 27일 울진, 30일 강릉, 10월 1일에는 38선을 돌파했다.

이처럼 큰 공을 세웠지만 극비로 진행된 작전이라는 이유로 전투에서 산화한 학도병들의 이름은 남겨진 것이 없고, 유해도 제대로 발굴되지 못했다.

장사리에는 장사상륙작전 기념공원과 전적비, 전몰용사 위령탑이 세워져 이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1950년 9월 장사상륙작전 과정에서 영덕군 장사해변에 좌초한 문산호. 영덕군 제공
1950년 9월 장사상륙작전 과정에서 영덕군 장사해변에 좌초한 문산호. 영덕군 제공

경북 영덕 장사해수욕장 문산호 전시관 전경. 김영진 기자
경북 영덕 장사해수욕장 문산호 전시관 전경. 김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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