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은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운명을 건 최후의 보루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국군 제2군단 예하 8사단과 6사단을 주축으로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서북방의 신녕 지역과 동북방의 보현산 지역에 대한 필사의 공방전 끝에 영천을 사수했다.
국군은 이를 계기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고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반격의 첫 발을 내딛게 됐다.
당시 2군단장이던 유재홍 준장은 "영천이 무너지면 적은 대구 또는 경주 방면으로 진격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낙동강 교두보는 자연 허물어 질 것이고 결국 나라를 잃게 될 것"이라며 "나의 지휘소는 전진을 할지라도 결코 후퇴는 없을지니 영천은 꼭 사수하라고 강력 지시했다"고 했다.


◆대한민국 명운 살린 영천 신녕전투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단행한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국군 6사단이 영천지역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 8사단의 공격을 저지시킨 방어 전투다.
낙동강 중동부 전선을 담당한 북한군 제2군단은 공세의 주 목표를 대구로 정하고 이를 탈취하기 위해 8사단과 15사단 등 4개 사단을 대구 전선에 투입했다.
안동~의성~대구 축선에 전차부대를 증원하는 등 병력을 집중 투입시키며 남진을 계획했다. 하지만 의성에서 국군 8사단에 의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축선을 군위 의흥~영천 신녕으로 변경하고 대대적 침투 작전을 전개하며 남진을 계속했다.
또 신녕 북쪽의 조림산 부근까지 진출해선 영천과 경산 하양을 목표로 한 점령 작전을 펼치며 강력한 공세도 이어갔다.
이에 영천 화산 일원에 급히 방어진지를 구축한 국군 6사단은 북한군 8사단과 15사단에 대한 집중적 포격으로 적의 대열을 분산시켰다. 유엔(UN)은 폭격기와 전폭기 혼성편대의 공중 폭격을 통해 상대 병력과 장비에 큰 손실을 입히며 공세 작전을 무력화했다.
그 결과, 북한군은 병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보급 차질과 연일 계속되는 전투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며 영천에서 고립된 채 각개격파를 당하는 처지로까지 몰렸다.
국군 6사단은 신녕지구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대구를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반격의 계기 만든 영천지구 전투
북한군 제2군단은 1950년 8월 공세에서 대구 축선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예하 15사단을 통해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또는 경주로 진격한다는 목표를 다시 설정했다.
국군 8사단은 그 해 9월 2일부터 13일까지 화북·자양면의 보현산 일원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영천 점령을 기도하던 북한군을 격퇴하고 영천을 지켜냈다.
북한군이 영천을 점령할 경우 국군 1군단과 2군단의 분리 뿐만 아니라 아군 유일의 동서보급로가 막혀 전시 상황이 크게 불리해질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특히 적이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면 왜관과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 방어선 후방이 차단돼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또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면 북한군 15사단과 12사단의 합세로 부산에 이르는 통로 개방으로 부산 교두보가 위협받을 처지였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1만2천여 명의 병력과 전차 12대, 76㎜ 곡사포 38문 및 122㎜ 곡사포 18문 등을 투입했다.
반면 국군은 병력 1만5천여 명에 105㎜ 곡사포 26문과 57㎜ 대전차포 6문 등에 불과했다.
국군은 병력면에서 다소 우세했으나 화력면에서 월등한 열세로 북한군에게 영천을 일시 빼앗기기도 했다.
때문에 국군 육군본부와 미군 8군사령부는 부산으로 이동할 만큼 대구 전선 일대는 개전 이래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보급 추진과 병력 증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전투력 약화와 전술적 측면의 실패로 경주 방면 20km를 남겨놓은 북안 임포에서 진격을 중단했고 국군은 반격의 서막을 올렸다.
국군은 그 해 9월 12일 북안 임포 남쪽에 주둔하던 북한군 15사단의 포병연대와 50연대본부를 공격해 섬멸했다. 경주 안강 방면으로 철수하던 적의 퇴로도 차단해 영천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하는 승리를 거뒀다.
국군 8사단은 3천799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309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전차 5대, 장갑차 2대, 화포 14문 및 소화기 2천327정, 차량 85대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측 피해는 전사 29명, 부상 148명, 실종 48명 등에 불과했다.
국군 8사단 소속으로 당시 전투에 있었던 김점칠 참전용사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후퇴했던 북한군이 우리가 점령했던 고지에 포탄을 있는대로 퍼부었다. 악착같이 사수했다"면서 "그렇게 버텨낸 것이 최후 승리가 됐다.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알고보니 인천상륙작전을 9월 15일 한 거 보니 그래서 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육성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영천대첩 안겨준 일화 3선
▷북한군 수송차량을 궤멸시키다= 1950년 9월 2일 이성가 국군 8사단장은 사단으로 배속된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를 영천역 서남 4km 남쪽 봉죽동 일대와 영천읍 북쪽 야산지대에 각각 배치했다.
북한군 15사단이 장악하고 있던 영천을 탈환하고 경주로의 진격을 막기 위한 작전 수립 차원에서다.
당시 15사단은 북안 임포를 진출 한계점으로 공격 행동을 중지하고 있었다. 국군의 국부적 반격으로 탄약과 연료를 제대로 보급받지 못해 기동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
이에 이성가 8사단장은 9월 7일 영천을 재점령하고 반격의 발판을 구축하기로 결심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때마침 이날 새벽 4시쯤 조교동 방향에서 조명등만 밝힌 북한군의 보급 차량 대열을 아군이 발견하고 기습 작전을 감행했고 뜻하지 않았던 30여 대의 보급차량을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리게 됐다.
이 전과는 영천 동남쪽 일대까지 진출해 있던 북한군 주력이 더 이상 작전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또 국군 8사단이 영천에서 순조롭게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일전이기도 했다.(이성가 장군 참전기 '영천대회전' 내용중)
▷불발탄이 안겨준 승리= 1950년 9월 2일 오후 시간대.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장 김종수 중령은 중대장과 참모들을 모아 놓고 영천 화산 723고지에서 북한군 공격을 위한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김 중령이 작전 명령을 하달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북한군이 쏜 82㎜ 박격포탄 한 발이 '탁'하는 소리를 내며 회의장 복판에 펴놓은 5만분의 1 지도를 꿰뚫었다.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되고 말도 없이 눈만 깜박거리는 사이 삶과 죽음을 가늠하는 수 초가 지나갔다.
불발탄이었다. 대대장과 참모들이 동시에 지른 환호성이 화산 계곡에 메아리치며 긴 여운을 남겼다. 사기가 오른 그들은 "우리는 안 죽는다. 운이 텄다"고 기뻐했다.
"전장에서 용감한 것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전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처럼 이날은 2대대 모두에게 불사신이 승리의 확신을 안겨준 행운의 날이었다.
이를 계기로 2대대는 지체없이 공격을 재개했고 적진인 725고지를 수복하고 여세를 몰아 전과를 확대하면서 북한군을 소탕하고 인접부대와 상호 지원할 수 있는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또 이 무렵 갑령에 투입된 3대대는 725고지 좌측의 320고지의 방어진지를 탈환하며 북한군의 주 접근로인 28번 국도를 완전히 장악하며 승전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보병제7연대 '초산전사' 내용중)
▷모르는게 약…신병이 적 탱크 잡아= 국군은 1950년 8월 22일부터 국민병 모집에 따라 소위 보충병이란 이름으로 각 부대마다 신병을 보충받았다.
전시이니 각자 부대에서 써먹으라고 했지만 총 한 번 쏘지 않고 오는 경우가 많은 그야말로 민간인과 다름없는 군인이 상당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이 전투의 승패를 바꾼 웃지 못할 희극도 벌어졌다. 국군 8사단에 배치된 한 신병은 배가 너무 고파 부대를 잠깐 이탈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다가 길을 잃었다.
그러다가 북쪽에서 내려오는 괴상하게 생긴 차량을 발견하고 어깨에 총을 맨 채 두 팔을 흔들며 태워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차가 북한군 15사단의 전차란 건 생각조차 못했다.
여기서 반전이 있었다. 북한군 전차장이 총조차 겨누지 않고 자신들을 세우는 신병을 보고 "우리가 국군에 완전히 포위됐다"고 착각한 것이다.
결국 전차장을 포함한 4명의 북한군은 신병을 찾으러 나온 국군에게 포로로 붙잡혔고 신병은 2계급 특진에다 휴가와 포상금까지 받았다.
게다가 전차에는 영천에 진입한 북한군 병력의 보급품 상황이 최악이고 어떻게 행동하라는 작전 전략 명령서도 있어서 우리군 정보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후에 자초지종을 들은 이성가 8사단장은 아마도 그 신병이 '아는 것이 힘'이란 명언을 거역한 최초의 남자였을지도 모른다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한다.(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내용중)
※도움말= 6·25참전 유공자회 영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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