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지금처럼 앞으로도

백창하 연출가

백창하 연출가
백창하 연출가

지금과는 다르게 동글동글한 얼굴에 통통한 볼을 가진 어렸을 적 나는 소심하고 숫기가 없었다. 얼마나 심한지 어른들이나 다른 친구들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아이였다. 지금 주위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유치원에 다닐 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못 했다. 부끄러워서. 수업이 마칠 때까지 낑낑거리며 참던 난 결국 매일 바지에 오줌을 싸버렸다. 늘 축축해진 유치원복을 입은 나를 내려주며 선생님과 어머니 서로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기억이 난다.

7살이 되던 해, 칠곡 태전동으로 이사를 했다. 할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집을 한 채씩 주며 모두 모으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촌들과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함께 자랐다. 손주들을 끔찍히 아끼시던 할아버지는 내게 초등학교 입학 전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맞고 다니지만 말거라." 그리고 다음날 나는 입학식에 참여한 모든 학생이 보는 앞에서 나와 키가 비슷한 친구와 주먹다짐을 했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학생이 되고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는 평생 친구 놈들을 만났다. 이놈들과는 사고도 많이 치고 웃기도 정말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나의 작은 세상이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놀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어느 날. 가족끼리 여행을 갔다. 우연히 조선소 근처를 지나다 아버지가 배를 건조하고 있는 현장을 보여주셨다. 아버지는 어마어마하게 큰 철 구조물 밑으로 차를 운전하시면서 이건 어떤 부분이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하셨다. 이렇게 큰 철 덩어리도 처음 보는데 이게 고작 배의 한 부분이라니. 가슴이 뛰었다. 그때 첫 꿈이 생겼다. 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그때부터 공부란 걸 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아마 고등학교 2학년 정도였을 거다.

대학은 당연히 공대로 갔다. 멋진 엔지니어를 꿈꾸며 들어갔지만, 현실은 너무 달랐다. 토니 스타크처럼 멋진 삶을 생각하고 간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온통 숫자, 계산, 역학, 프로그래밍, 시험 따위였다. 적응이 안 됐지만, 등록금이 아까워 우선을 열심히 하기는 했다. 그러다 군대에 갔다.

군을 제대하고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지루한 학교생활을 하던 중 대외활동으로 우연히 대기업에서 주최하는 보컬 클래스를 알게 되었다. 평소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하던 차라 한 번 가서 늘어나 보자 싶어 지원했다. 하지만 떨어졌다. 정원이 다 찼단다. 아쉬워하는 내게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 학생 대신 뮤지컬 클래스가 남았는데 들어보래?"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는가 싶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조금 더 해보자 싶어 뮤지컬 전문 극단에 오디션을 보고 워크샵 단원으로 들어갔다. 이후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현장에서 배우로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고민이 많았다. 현실적인 부분이 걸리기 때문이니 말이다. 혼자서 끙끙거리던 내게 아버지는 한마디 하셨다. "네가 하고 싶으면 재밌게 해라"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정말 정신없이 흘러왔다. 매 순간이 배움에 연속이었고, 동료들을 만났으며, 그들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의 단체도 생기고 나와 함께 해주는 새로운 동료들도 생겼다. 행복하고 감사한 나날들이었다.

쓰고 보니 이렇게 저렇게 많이 변하기도 하고 녹록지 않았을 텐데 두둥실 참 잘도 흘러왔구나 싶다. 앞으로도 많은 날이 있을 테고 궁금해도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일을 만나겠지.

그저 지금처럼 잘 흘러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