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다. 만일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만주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 같은 것 말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필연적인 역사였다. 신라는 고구려·백제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백제와 맞섰고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7세기 한반도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3국간의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고구려의 남진에 대응한 신라와 백제의 '나·제 동맹'이 깨진 후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재위하던 시기 끊임없이 신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생존을 위협했다. 같은 시기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등장한 신라 '선덕여왕'은 백제의 위협에 맞서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황룡사9층 목탑'을 건립, 불교를 통한 호국(護國)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동시에 김춘추를 당나라와 고구려에 보냈다. 삼국통일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삼국통일에 대한 오해
경주 도심을 차지한 대릉원과 노동리·노서리 고분군과 오릉, 삼릉 등 신라왕들의 고분은 대부분 시내와 외곽에 산재해있지만 문무왕릉은 없다. '고분 도시' 경주에서 문무왕릉은 바다에 묻혀있다.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인 '문무대왕릉'이 그것이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등 대를 이은 두 여왕과 태종무열왕(김춘추) 시대를 거쳐 즉위한 문무대왕(661~681)은 태자시절 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한 데 이어 대(對)고구려, 대(對|)당 전쟁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한 전쟁이 끝나면 다음 전쟁이 이어졌고 다른 적을 격파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과업을 시작한 선왕 김춘추의 시호가 무열(武烈)왕인데 반해 그의 시호가 '문무'(文武)라는 것은 '전쟁광'처럼 역사에 기록되는 것을 피했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신라가 주도한 삼국통일에 대한 적잖은 오해가 우리 역사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다.
고구려나 백제가 아닌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바람에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과, 신라가 당(唐)나라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외세 의존적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여전하다. 역사적 사실은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통해 백제와 신라의 존립을 위협했고 이에 대응한 '나·제동맹'이 100년 이상 지속되다가 깨지면서 백제와 신라는 '앙숙전쟁'에 돌입했다는 점이다.
백제 및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 생존이 위협받던 신라는 외교력을 발휘,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이에 백제는 왜(倭)와 연합했으나 나·당 연합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백제의 외교실패였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한 신라 외교의 승리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신라의 연대요청을 무시한 고구려도 신라를 과소평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된 것은 절박했기 때문이다.백제와 고구려는 삼국통일에 대한 의지는 물론, 군사력을 갖추지도 못했고 국가생존에 대한 위기감마저 없었다.

◆동해 용(龍)이 되어 왜적의 침입을 막겠다는 문무대왕릉
경주시내에서 동해를 향해 달리다가 월성원전을 지나 5분여만 더 가면 문무대왕면 봉길리 바다를 만난다. 동해바다는 거침이 없다. 망망대해다. 봉길리 바다에선 바위섬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갈매기들이 온전하게 차지한 문무대왕릉이다.선대왕들이 이루지 못한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한 위대한 왕으로 기록된 문무왕은 왜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고 화려한 부장품으로 치장한 '제왕의 능'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임종한 뒤에 열흘이 되면 바로 왕궁의 고문(庫門) 밖 뜰에서, 서역의 법식에 따라 불로 태워 장사지내고, 상복을 입는 경중이야 본래 정해진 규례가 있을 터이니 장례절차는 힘써 검약하게 하라"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神文王)은 부친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다. 문무왕이 죽자 '이리들의 산'이라는 낭산(狼山)에서 화장을 한 후 동해 수중릉을 만들어 안치했다.
그리고 문무대왕릉과 가까운 곳에 짓고 있던 절을 완공한 후 '감은사'(感恩寺)라 고쳤다. 감은사 금당 섬돌 아래로 바다가 있는 동쪽으로 구멍을 뚫어 용(龍)이 된 선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후에 대왕암에서 용이 나타나는 것을 본 곳에 정자를 지었다.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곳에 지어진 정자가 이견정이다. 지금은 수리중이다.

삼국유사와 감은사 '사중기' 는 문무왕이 동해 용(龍)이 되어 왜적의 침입을 막겠다고 하여 수중릉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의 속국지배야욕까지 패퇴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문무왕은 왜 성대한 제왕의 장례를 마다하고 신라역사상 전무후무한 서역방식 '화장'을 선택하고 유골마저 바다에 산골하게 하였을까?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언 대신 성대한 장례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문무왕은 평생 전쟁터에서 지냈다. 태자시절부터 그는 김유신 장군을 도와 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했고 백제가 망한 직후 왕위에 올라 고구려와의 전쟁에 몰입했다. 이어 당(唐)이 계림도독부를 설치, 야욕을 드러내자 670년부터 7년간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김춘추)가 시작한 통일대업을 마무리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지만 20년간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은 문무왕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불교식 화장을 고집한 것은 일생동안 전쟁으로 점철된 대왕의 일생에 대한 회한의 심정을 대신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느 왕도 감히 실행하지 못한 화장장례와 유해를 바다에 수장하도록 한 문무왕의 결단은 동서양의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문무왕은 그렇게 해서라도 나라를 지키려던 자신의 호국의지를 표현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선왕의 자기희생에 감사한다는 뜻을 가진 "감은사지"
얼마 전 방송된 TV의 짝짓기 프로그램의 무대로 감은사지가 나왔다. 짝을 찾기 위해 나온 솔로남녀가 함께 탑돌이를 하면서 짝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장면이 나와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모든 종교가 마음의 위안을 얻고 기복신앙이라지만 감은사는 문무왕으 호국(護國)의 뜻을 담아 창건한 절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지만 여전히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최우선 국가적 과제였고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보살펴야 하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적의 공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군사력을 정비하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왕의 노력도 대대적으로 드러나야 했다.

문무왕은 자신의 주검을 민심수습에 활용하는 제왕으로서는 하기 힘든 정치적 결정을 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례를 소박하게 치르면서 민심수습에 활용을 했다. 당초 왜적을 무찌르겠다는 의미로 '진국사'(鎭國寺)라 지은 절은 선왕의 자기희생에 감사한다는 뜻을 담아 '감은사' 바뀌었다.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을 위해 법당 아래로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는 정치적이다. 한 번 피리를 불면 모든 적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만파식적' 설화도 마찬가지다. 물론 당시로서는 왜구(倭寇)가 신라의 크나 큰 골칫거리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장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내부의 적이 드러나는 등 정국이 어수선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물러갔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문무왕의 화장 장례가 주는 충격은 대단했다. 그때까지 불가(佛家)에서만 행하던 불교식 화장(火葬)을 왕이 자청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왕경(경주) 월성 인근에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는 왕릉을 조성하겠다며 민가를 수용하는 일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통일신라'의 수도 왕경은 국제도시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인은 '부처의 땅'(佛國)에 산다고 생각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왕경을 중심으로 도처에 사찰이 지어졌고 백성들도 모두 부처를 믿었다. 그 중에서도 '낭산'은 신라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수미산이었다. 선덕여왕의 능도 도리천이라 믿는 낭산 자락에 있다.
그래서 왕으로서는 최초의 장례인 문무왕의 다비식은 낭산 자락에서 열렸다. 문무왕의 다비식을 거행한 자리가 낭산 선덕여왕릉으로 올라가는 왼쪽에 자리한 '능지탑'으로 추정된다. 문무왕의 유언에 따른 '고문(庫門)밖'이 그곳이라 추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통합이 필요한 시대다. 통일과 통합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우리의 소원이지 않은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려는 용기를 가진 문무대왕 같은 통합의 아이콘이 절박한 시대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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