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작가와 송혜교가 다시 호흡을 맞췄다. '태양의 후예'로 중국 대륙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이 콤비가 들고 온 작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놀랍게도 이 작품을 통해 두 사람은 모두 파격적인 변신을 보여준다.
◆김은숙 작가·송혜교의 놀라운 변신
무언가 반짝반짝하고 달달한 작품이 아닐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는 그런 선입견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화려하고 밝은 에너지의 작품들을 멜로 기반 위에서 주로 그려왔던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니 말이다. 여기에 송혜교가 주연을 맡았다. '가을동화'부터 '올인', '풀하우스', '그들이 사는 세상', '그 겨울, 바람이 분다', '태양의 후예', '남자친구' 그리고 최근작인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까지, 송혜교가 해온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멜로다. 그래서 '멜로 퀸'이라는 수식어가 그에게는 늘 따라붙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는 이미 '태양의 후예'로 호흡을 맞춘 바 있고, 다양한 블록버스터 장르들이 더해지긴 했지만 그 작품에서도 역시 시청자들을 감성 짙은 멜로의 세계 속으로 빠뜨린 바 있다. 그러니 '더 글로리'(제목도 '영광'이라니 이보다 더 블링블링한 느낌을 줄 수가 있을까)에 화려한 성공과 달달한 멜로의 향기를 대중들이 기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선입견은 이 드라마의 첫 시퀀스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져버린다. 가상의 도시인 세명시로 들어오는 차량을 따라 짙은 안개가 낀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는 오프닝은 사람의 온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어딘가 앙상하고 음산한 느낌을 주고,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은 어느 옥상에서 김밥을 입에 넣고 씹는다. 그건 먹는다기보다는 씹는 느낌으로 거의 웃은 적이 없어보이는 이 어두운 인물의 메말라버린 내면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집주인은 문동은에게 '악마의 나팔꽃'을 하나 꺾어 건네고, 무심히 화분을 깬다. 화분은 그렇게 깨서 버리는 거라며. 그러자 순간 문동은의 아픈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무언가 씹는 입과 탁 켜지는 라이터, 누군가 내지르는 발길질과 추락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동은, 찢기는 공책, 버려지는 핸드폰 그리고 떨어져 내리던 문동은이 마치 화분처럼 산산조각 나는 광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무언가 방에 사진들을 벽면 가득 붙이고 있는 문동은의 갈갈이 찢기고 화상자국으로 가득한 몸이 보인다. 그 산산조각 난 화분처럼 문동은은 몸도 마음도 갈갈이 찢겨져 있다. 여기서 달달함이나 반짝반짝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선입견은 저 화분처럼 산산이 깨진다. 무엇보다 송혜교의 거의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듯한 낮은 목소리가 분위기를 차갑게 식게 만든다.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자극적이고 끔찍할 거야. 막을 수도 없앨 수도 없을 거야."
대사는 분명 김은숙 작가 특유의 문학적인 느낌이 묻어나지만, 그 문장들은 '사랑'과는 거리가 먼 '저주'로 바뀌어있다. 그걸 멜로 퀸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송혜교가 무심하고 쓸쓸한 목소리로 툭툭 던져 넣는다. 놀라운 변신이다. 그것도 아예 작정하고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변신.
◆학교폭력, 복수극, 청소년 관람불가
김은숙 작가가 작정하고 건드리려는 이야기는 '학교폭력'이다. 최근 들어 이 소재는 뜨겁다. 연상호 감독이 2011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고 작년 드라마로도 리메이크돼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돼지의 왕'이 그렇고,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돼 신드롬급 인기를 끈 '약한 영웅'이나,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3인칭 복수' 같은 작품들, 나아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였던 '지금 우리 학교는'도 모두 학교폭력을 소재로 다뤘다. 학교폭력이 이처럼 콘텐츠의 뜨거운 소재로 급부상한 건, 먼저 이 소재가 갖는 높은 수위의 자극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서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그 폭력 수위는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할 정도로 세다. 물론 이런 소재들은 그간 지상파 중심의 드라마 환경 속에서는 제작조차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넷플릭스를 필두로 다양한 OTT의 시대가 되면서 수위 높은 자극적인 소재나 표현들이 가능해졌고, 그간 다뤄지지 않았던 청소년 학교폭력이라는 소재가 일종의 블루오션처럼 됐다.
하지만 학교폭력을 다룬 콘텐츠들이 이처럼 많아진 건 단지 자극적인 소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이 사안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점 커지고 있는 데다가, 여기에 일종의 수저계급이라는 사회 불평등 시스템이 얹어지면서 이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콘텐츠들에 대한 호응도 커지고 있어서다.
'더 글로리'도 문동은이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당하는 이유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무도 챙겨주거나 구해주는 어른들이 없어서다. 담임은 오히려 부자 부모를 둔 가해자들을 두둔하고, 심지어 엄마도 몇 푼 돈에 딸의 폭력을 눈감아준다. 구해달라고 도와달라고 그토록 외치지만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반면 박연진(임지연) 같은 가해자들은 끔찍한 범죄와 폭력을 일삼지만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가 그 범죄를 알면서도 덮어주고, 돈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걸 자식들에게 알려준다. 저들이 보는 세계는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문동은 같은 가난한 이들은 언제든 밟거나 부리다가 버려도 되는 계급이다. 그러니 문동은이 하려는 복수는, 자신의 삶 전체를 망가뜨린 저들에 대한 사적 복수이면서 동시에 약자이자 피해자들의 연대로, 저 강자로 군림하는 가해자들의 연대를 무너뜨리는 사회적 복수이기도 하다. 김은숙 작가는 작정하고 학교폭력 문제를 다뤘고, 이를 위해 마약, 섹스, 폭력 같은 저들의 세계를 청소년은 볼 수 없는 수위로 적나라하게 이야기에 담아냈다.
◆말의 타격감과 바둑 같은 수 싸움
하지만 마약, 섹스, 폭력이 점철된 학교폭력이라는 소재가 다뤄지고 있지만, '더 글로리'가 하는 복수극은 그 방식이 사뭇 다르다. 예를 들어 '약한 영웅'이나 '3인칭 복수' 같은 작품은 폭력에 맞서는 주먹이라는 '액션'이 그 복수극 서사의 주력 방식으로 활용되지만, '더 글로리'는 그런 액션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말이 주는 타격감이 카타르시스를 주는 작품이다.
"죽으면 꼭 천국가. 사는 동안은 지옥일테니", "나에게 빌어야 해. 추락할 너를 위해, 타락할 나를 위해", "우리 천천히 말라 죽어 보자. 연진아 나 지금 너무 신나"같은 말맛이 살아있는 김은숙 작가의 대사들은 적재적소에 들어가 듣는 이들을 시원하게 해준다.
그리고 실제로 문동은이 하는 복수의 방식은 이 작품 속에 또 하나의 소재로 담겨져 있는 '바둑'을 닮았다. 수 싸움을 통해 내 집을 넓히고 상대방의 집을 빼앗는 바둑처럼, 문동은은 철저히 가해자들을 분석하고 그들이 가진 약점들을 공략함으로써 그저 블링블링해보였던 저들의 삶을 하나하나 무너뜨린다.
본래 건축가가 꿈이었던 문동은이 그 꿈을 접고 대신 바둑을 두는 것처럼 누군가의 집을 빼앗고 무너뜨리는 그 변신은, 가난하게 태어난 이들이 집 한 채 구하기 위해 평생을 머슴처럼 살아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 그려진다. 그는 그렇게 버텨내며 자신의 집 한 채를 얻어내기 보다는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저들의 집을 빼앗거나 부숴버리겠다 선언하는 것이니 말이다.
8회까지 시즌1이 공개됐고, 이제 문동은이 저들의 집을 야금야금 먹어가기 시작했다. 과연 나머지 시즌2에서는 어떤 시원한 한 수를 보여줄까. 그리고 그 한 수는 학교폭력과 수저계급의 시스템에 어떤 일갈을 던질 수 있을까. 벌써부터 3월에 공개될 나머지 시즌2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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