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나라 발해조선
로마는 서기전 753년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서양 지중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라고 말한다. 아마도 서양문명을 대표하는 고대국가가 로마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의 로마 시대에 동양의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가 있는가. '산해경'에서 "발해의 모퉁이에 있다."고 말한 발해조선이 당시 동양문명을 대표하는 나라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하족이 고대 동양문명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고 인식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발해유역에서 제단, 여신전, 적석총으로 대표되는 선진적인 홍산문화가 발굴됨으로서 만리장성 밖 동북방 밝족의 동이문화가 중국문화의 원류로서 기능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중원의 황하문명에 앞서 5,500년 전 밝족이 창조한 위대한 홍산문화를 계승하여 발해유역에서 첫 통일왕국을 건설한 나라가 발해조선이다. 동양문명의 새벽을 연 홍산문화와 동아시아의 첫 통일왕국 고조선이 발해유역을 중심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발해유역 특히 발해만 일대가 전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천혜의 땅이기 때문이다.


발해조선의 중심지로서 송宋나라 때까지 조선성朝鮮城 유적이 남아 있었다고 '태평환우기'에 기록된 하북도 노룡현 일대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북대하北戴河 부근이다. 바다와 육지가 인접한 이 지역은 오늘날 중국공산당 간부들의 휴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여름이면 모택동이 수영을 즐겼던 곳이다.
이 지역을 역사상에서 요서遼西라고 호칭했는데 북쪽으로 올라가면 수렵이 가능한 초원이 있고 서쪽으로 들어가면 농경 지대가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으로 내려가면 어렵이 가능한 바다가 있다.

황하 중류에 해당하는 중원지역은 농경은 가능하지만 초원도 바다도 없다. 그러므로 경제가 동북방 요서에 비해 낙후할 수 밖에 없었다. 발해만의 요서 지역은 농경과 수렵과 어렵이 동시에 가능했기 때문에 여기서 다른 지역에 앞선 선진적인 경제와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이 천혜의 땅을 발판으로 동양문명의 새벽을 연 것이 홍산문화이고 그것을 계승발전시킨 나라가 발해조선이다.
발해는 동양의 지중해이다. 서양문명이 서양의 지중해에서 태동했던 것처럼 동양문명도 동양의 지중해인 발해유역에서 탄생하여 발해조선에 의해 계승됨으로써 발해조선이 동양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발해조선이 로마보다 위대한 이유
영국의 역사가 기번(1737~1794)은 '로마제국쇠망사'를 썼다.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당신은 이 저서 하나로 유럽 문단의 최고봉에 섰다"라고 극찬했다. 영국 수상 처칠과 인도 수상 네루 등은 기번의 책에 심취하여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고 실토했다. 이 책이 명저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위대한 로마 제국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로마의 위대함을 측정하는 기준은 정복의 신속성도 아니고 또한 그 영토의 광활함도 아니다. 영토의 크기만으로 평가한다면 불모의 땅 시베리아에서 군림했던 왕이 더 위대할 것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또한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7년째 되는 해 여름에는 어느새 인도까지 진출했다. 로마 제국의 위대함은 여러 대에 걸쳐 영민한 지혜에 의해 훌륭하게 유지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기번은 로마 제국의 위대성을 평가하는 기준을 정복의 신속성이나 영토의 광활함이 아닌 천여 년에 걸쳐 국가를 유지했던 영민한 지혜에 두었다.
로마는 서양의 지중해에서 건국하여 천년 왕조를 유지했지만 동양의 지중해에서 건국한 발해조선은 2,000년 동안 왕조를 유지하였다. 기번의 평가 기준에 따르면 당연히 로마보다 발해조선이 훨씬 더 위대한 것이다.
혹자는 발해조선이 2,000을 유지했다는 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발해조선은 실재했고 2,000년 동안 존속했으며 로마보다 위대한 나라였다는 것이 여러 문헌자료를 통해서 고증이 가능하다.
◆발해조선의 2,000년 역사를 입증하는 문헌적 근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란 분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는데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였다."
'위서'는 남북조시대 북제北齊의 위수魏收(서기 507~572)가 편찬한 중국의 정사로서 선비족 북위 정권의 역사를 기술했다. 선비족은 고조선의 후예란 것은, 남북조시대 유신庾信이 쓴 모용은신도비명 서두에 조선朝鮮을 그들의 뿌리로 언급한 데서 잘 나타나 있다.
'위서'는 앞의 서기序記 즉 서론 부분에서 선비족의 먼 조상 20여 대의 역사를 다루었는데 단군왕검에 관한 내용은 아마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연이 고려 때 '삼국유사'를 쓸 당시는 2,000년 전 건국한 단군왕검의 기록을 '위서'에서 보고 인용했는데 오늘날 중국의 '위서'에는 왜 이 기록이 사라지고 없는가.
중국의 송나라 즉 우리나라 고려시대까지는 발해조선의 역사가 전해졌다. 그런데 중국에서 명나라 주원장이 집권을 하고 그 지원을 받아 이성계가 한반도에 한양조선을 세우면서 대륙의 지배자로서 군림했던 발해조선의 역사가 말살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때 '위서'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서 발해조선에 관한 많은 기록이 삭제되었고 또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우리 스스로도 발해조선에 관한 기록을 감추거나 삭제하는 못난 짓을 했다.
그러면 고조선이 2,000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위서'의 기록을 뒷받침할 근거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명나라 이전의 중국문헌을 눈여겨보면 그것이 가능하다.
'상서대전'에는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갔다.(走之朝鮮)"라고 하였고 '한서' 지리지에는 "은나라의 도가 쇠퇴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갔다.(殷道衰 箕子去之朝鮮)"라고 하였다.
기자(?~서기전 1082)는 3,000년 전의 인물이다. 기자가 망명지로 선택한 나라가 조선이었다면 3,000년 전에 조선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 아니겠는가.
관중管仲(약 서기전 723~서기전 645)은 약 2,700년 전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으로 법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저서 '관자'에 제나라가 "밝조선發朝鮮"과 교역한 기록이 나온다. 이는 관중이 생존했던 중국의 춘추시대에 발해조선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다.
'전국책戰國策'은 서기전 476년~서기전 221년까지 250여 년간의 전국시대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전국책' 가운데 "연나라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다.(燕東有朝鮮遼東)"라고 보인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2,200~2,400년 전 중국의 전국시대에 연나라 동쪽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진시황은 서기전 221년에 중원을 통일했다.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의 강역을 설명하면서 "동쪽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地東至海曁朝鮮)"라고 말하였다. 이는 진시황시대에 진나라 동쪽에 조선이란 나라가 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무제 유철(서기전 156~서기전 87)은 서한의 제7대 황제이다. '사기' 조선열전은 한무제가 조선을 공격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는 서한시대에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중국에서는 요임금(서기전 2447~서기전 2307) 시대로부터 한무제 시대까지 2,000여 년 동안 왕조가 무려 수십 번 교체되었는데 발해조선은 하, 은, 주 3대를 지나 춘추, 전국시대를 거쳐서 진시황, 한무제 시대까지 2,000여 년 동안 건재했다는 것이 중국의 역대 문헌 기록을 통해서 입증된다. 로마를 능가하는 발해조선의 영명한 지혜가 아니면 이런 일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로마는 겨우 천년 왕정을 유지했지만 발해조선은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2,000년을 유지한 위대한 왕조였다. 동양문명을 대표하는 문명은 황하문명이 아니라 발해문명이고 동양의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는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밝족의 발해조선이었던 것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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