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잊혀서는 안 될 이름, 심정민

송신용 서울지사장
송신용 서울지사장

괴이한 시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북의 도발이 더해져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국민의 안보불감증이 도를 넘었다. 우크라이나 전장(戰場)터는 딴 나라 일이 된 지 오래고, 북핵에는 '설마'라는 무감각이 만연해 있다. 여야는 북한의 도발 쇼에 이념 공방만 주고받고 있다.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은 반드시 망한다. 그러나 전쟁을 잊은 나라 또한 망한다"(리델 하트)는데 우리가 딱 그렇다. 올해로 6·25 정전(停戰·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함) 70주년이건만 정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북한 간첩이 전국에서 활개를 친 'ㅎㄱㅎ' 사건은 자업자득이나 마찬가지다. 그제 방첩 당국은 국내 진보정당 간부 등이 지하 조직을 결성, 반(反)정부·이적 활동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들은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의 교육을 받고 국내에서 노동계 인사 등을 포섭해 'ㅎㄱㅎ'이라는 지하 조직을 만들어 암약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즈음엔 '진보·촛불 세력과 연대하고 중도층을 규합해 반정부 투쟁에 나서라'는 지령들이 내려왔다고 한다.

지난달에는 북한군 무인기(드론) 5대가 우리 상공을 침범해 휘젓고 간 사태가 있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이 뚫렸고, 용산 대통령실까지 들여다봤다. 우발적인 도발이 아니라 핵, 미사일에 이어 한반도 긴장을 고조하려는 북의 치밀한 작전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이번처럼 여러 대가 동시에 출현한 것은 처음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와 시기, 과거와 다른 방식의 도발이 일상사가 되다시피 했다

우리 군의 대응은 허술했다. 공군 전투기와 육군 공격 헬기를 띄웠는데 단 1대도 잡지 못했고, 외려 공군 KA-1 경공격기가 추락하는 망신을 당했다. 안 그래도 북한은 2014년과 2017년 무인기를 침투시켜 경북 성주와 청와대를 촬영한 적이 있다. 이후 군은 무인기 대응 전력 확보에 주력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허언에 그쳤다. 서해 공무원 피살 진상 은폐 배경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UN 연설에서 북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검찰 공소장을 보면 안보 해이는 예고된 것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그린 영화 '영웅'이 흥행몰이를 이어가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다.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안 의사의 위국헌신(爲國獻身) 정신을 마음에 담으려는 관객이 적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다. 대한민국이 휘청휘청하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리에서 본분을 다한 인물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고 순직한 심정민 전 공군 소령도 그중 한 명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기지를 이륙하던 중 추락한 공군 F-5E 전투기의 조종사가 탈출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민가를 피하려고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3일 공군에 따르면 조종사 고(故) 심정민(29) 소령은 지난 11일 기체 추락 당시 민가의 피해를 막고자 죽음의 순간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고 사투를 벌였던 정황이 사고 조사에서 드러났다. 사진은 순직한 고 심정민 소령. (연합뉴스)
임무 수행을 위해 기지를 이륙하던 중 추락한 공군 F-5E 전투기의 조종사가 탈출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민가를 피하려고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3일 공군에 따르면 조종사 고(故) 심정민(29) 소령은 지난 11일 기체 추락 당시 민가의 피해를 막고자 죽음의 순간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고 사투를 벌였던 정황이 사고 조사에서 드러났다. 사진은 순직한 고 심정민 소령. (연합뉴스)

1년 전인 지난해 1월 11일 오후 1시 43분. 심 소령이 수원 기지에서 정상적으로 이륙한 직후 양쪽 엔진에 화재 경고등이 떴다. 이에 '이젝션'(Ejection·탈출)을 두 번 외치며 비상 탈출 의사를 표명했지만 항공기 앞쪽에 민가가 다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심 소령은 끝까지 비상 탈출 좌석 레버를 당기지 않고 조종간을 잡은 채 출격의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대구 출신으로 능인고를 졸업한 그는 "나의 꿈은 오직 전투기 조종사"라고 외치며 창공에서 꿈을 펼치던 투철한 군인이었다. 심 소령은 장교 11명을 배출한 '병역 명문가' 최원일(갑종 156) 씨 일가 구성원이기도 하다.

고 심 소령의 1주기 추모식이 오늘 오후 1시 30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다. 안보 위기의 시대, 국민 모두가 위국헌신을 기억하고 영웅을 잊지 않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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