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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21> 정경을 묘사하는 음악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비발디. 매일신문 DB
비발디. 매일신문 DB
서영처 계명대 교수
서영처 계명대 교수

클래식 음악이 묘사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클래식 음악을 추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상도 알고 보면 대상의 특성이나 속성을 추출하고 파악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묘사는 어떤 현상을 관찰하고 감각하여 지각한 것을 그림 그리듯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묘사는 회화적이다. 문학이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문자로 대상을 묘사한다면 음악은 음표와 쉼표로 이루어진 음악 문자로 대상을 묘사한다.

음악에서 묘사는 정경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한다. 정경 묘사는 17세기 풍경화의 탄생과 관련이 깊다. 풍경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인간의 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입체적인 자연으로서 뿐만 아니라 체험한 자연, 또는 인간의 내면과 관념을 투사한 자연으로 나타난다. 르네상스에서 싹 튼 인간 중심주의는 화가들에게 성화와 절대자의 인물화를 그리는 대신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음악에서도 17-18세기는 여전히 교회 음악에 치중하고 궁중 음악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정경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지대했다. 이 시기의 정경은 개성적인 표현보다 유형화되고 표상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정경 묘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비발디(1678-1741)의 '사계'를 들 수 있다. 사계는 작자 불명의 소네트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각각 3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계'는 자연의 변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유롭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묘사한다.

봄은 E장조로 화사한 봄날을 경쾌한 리듬으로 표현한다. 2악장 라르고(Largo)는 정경 묘사가 특히 뛰어나다. '꽃이 만발한 목장에는 나뭇잎이 달콤하게 속삭이고 양치기는 충실한 개를 곁에 두고 졸고 있다.'라는 표제에 맞추어 비발디는 독주 바이올린의 느린 선율로 완만한 구릉으로 이루어진 목장과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목동의 모습을 그린다. 합주 바이올린은 점 16분음표와 32분음표의 연속 리듬으로 잔잔한 바람과 나뭇잎의 속삭임을 묘사한다. 이따금 비올라가 저음으로 컹컹 짖으며 양치기 개처럼 양 떼들을 지킨다. 음악을 듣다 보면 양치기 개가 꼬리치는 모습이 어른거리고 어느새 라르고의 선율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나무 그늘 아래 목동이 되어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묘사의 힘이다. 비발디는 감정을 절제하고 필요한 정경을 구체화하며 선율을 간결하게 제시하면서 묘사에 성공한다.

바흐(168-1750)의 사냥 칸타타(BWV280) 중 '양들은 한가롭게 풀을 뜯고'는 바로크적 묘사의 객관을 들려준다. 이 곡은 가사 없이 독주 악기나 관현악으로도 많이 연주한다. 바흐가 작센공의 의뢰로 작곡한 이 곡은 양들이 초원에서 풀을 뜯는 한가로운 정경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리코더가 반복하는 3도 하행진행은 삼삼오오 모인 양들과 포동포동하게 살찐 양들을 묘사한다. 서정적이고 극적인 진전은 없지만 이 곡은 한순간 작센의 군주를 선한 목자로 격상시킨다. 언어와 달리 발현하는 음들의 울림 속에는 상징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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