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줍은 소년, 종이 인형으로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다.
1936년 8월 1일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북부 아프리카의 알제리 오랑(Oran)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이브 앙리 도나 마티외 생 로랑(Yves Henri Donat Mathieu-Saint-Laurent)이다.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지낸 기억들은 훗날 특유한 색감의 사용과 에스닉 룩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브 생 로랑의 아버지는 보험회사와 극장을 운영하였고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11세 때, 루이 주베가 감독한 연극<아내들의 학교>를 본 후 크리스찬 베라르(디자이너, 화가)가 디자인한 무대 세트와 고전 의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브 생 로랑은 연극 속 주인공들의 의상을 미니어처로 직접 만들어 예술적 창작 실현과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패션잡지에서 좋아하는 모델의 실루엣을 가위로 오려서 잉크와 수채화 물감으로 직접 그린 옷을 만들고 어머니의 옷을 잘라 드레스를 만들어 종이 인형 패션쇼 놀이와 종이집의 옷장을 채워나갔다. 그는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혼자 인형 옷을 만들며 노는 것을 좋아하였고 어린 시절 그의 친구는 오직 인형들이 전부였다.
사춘기 시절 문학과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많은 이브 생 로랑의 대표적 작품이 있다. 소설<마담 보바르>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의상과 스토리를 그림으로 표현 한 삽화 13점이 15세 천재소년의 소설 속 드로잉 작품이다.
1953년, 17세가 되던 해에 파리에서 열린 국제 양모사무국 주관의 디자인 콘테스트(국제 드 라 레인 대회)에 참가하여 드레스부문 3등을 수상하고, 그다음 해 1954년 11월에 재도전하여 드레스 부문 1등을 수상했으며 코트 부문 1등은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수상했다. 그는 오랑을 떠나 파리로 향해 파리의상조합에 진학하였으나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3개월 만에 자퇴했다.

◆ 크리스찬 디올이 인정한 천재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보그(Vogue) 프랑스 편집장인 미셸 드 브루노프가 이브 생 로랑의 의상스케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아직 미발표된 크리스찬 디올의 의상스케치와 상당히 유사한 스타일임을 의미심장하게 여기고 디올에게 소개하면서 19세의 이브 생 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의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다. 입사 2년 뒤인 1957년 디올의 F/W컬렉션에서 34점의 의상을 디자인하고 디올에게 인정받으며 이브 생 로랑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1957년, 디올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21세의 이브 생 로랑은 그를 계승하여 세계 최연소 디자이너가 되었다. 다음 해 1월 이브 생 로랑의 디올 하우스 첫 컬렉션은 성공적이었으며 트라페즈 라인의 젊고 우아한 스타일에 극찬을 받았고 니먼마커스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디올에서 6번의 컬렉션으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이브생 로랑은 사회적 변화와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의 컬렉션은 결국 여성들에게 외면되었다. 그러던 중 마르셀 부삭(디올의 소유권자)의 권유로 알제리 독립 전쟁의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되었으나 심각한 신경쇠약으로 3주 만에 제대하였다. 제대 후 일방적 계약 파기로 디올에서도 해고된 이브 생 로랑은 디자이너로서의 좌절과 전쟁으로 인한 충격으로 약물과 알콜 중독에 의존하게 되었다.

◆ 평생의 동반자, 피에르 베르제와의 만남과 YSL의 설립
이브 생 로랑의 연인이자 사업파트너 피에르 베르제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1957년 10월 30일 크리스찬 디올의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약물 중독과 방황으로 위기에 처한 그에게 피에르 베르제는 디자이너로서 독립할 수 있도록 브랜드 사업을 제안하였고 그들은 1961년 12월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고 그래픽 디자이너인 카산드라가 디자인한 YSL(이브 생 로랑)의 고유 로고도 만들었다.
1962년,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이브 생 로랑의 첫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미국 잡지 <라이프>는 그의 컬렉션을 보고 '샤넬 이후 최고의 수트 메이커'라고 호평했다.

◆ 최초의 수식어가 많은 패션 혁명가
1966년은 이브 생 로랑의 패션 역사에 기념비적인 해이다. 당시 부유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고가의 고급 맞춤복(오트쿠튀르) 라인을 대중적으로 입을 수 있는 기성복(프레타 포르테) 라인 '생 로랑 리브 고쉬'를 론칭했다. 그리고 같은 해 화려한 드레스만을 착용하는 여성들에게 혁명적인 이브닝 웨어 '르 스모킹 수트'(프랑스어로 턱시도를 뜻함)를 발표했다.
르 스모킹 수트는 1930년대 독일 여배우의 남장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여성들에게 실용적이면서 멋스러운 바지 수트를 선보였다. 이후 여성들에게 자유와 권력을 주었다는 패션사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를 되었다.

1968년에는 아프리카 밤바라족의 예술작품과 의상에서 영감을 받아 아프리카를 주제로 디자인한 컬렉션에서 사파리 재킷과 점프수트를 최초로 선보였다. 1971년, YSL의 첫 남성향수를 론칭하며 자신이 직접 누드 화보를 촬영하여 큰 이슈가 되었다.
그 외에도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최초로 흑인 여성을 모델로 세운 디자이너이며, 패션쇼 피날레에 디자이너가 나와 인사하는 것도 처음으로 시도한 디자이너이다. 이렇게 최초의 수식어가 많은 디자이너로 1982년 12월부터 1984년 9월까지 '이브 생 로랑, 25년간의 디자인'이란 제목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렸는데 그것 또한 생존한 패션디자이너의 회고전을 박물관에서 여는 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인 만큼 이브 생 로랑의 명성은 대단했다.

◆ 패션계의 큰 별이 지다.
2002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40주년 컬렉션을 끝으로 그의 나이 65세에 은퇴했다. 고별 컬렉션에서 100여 명의 모델들이 250벌 넘는 의상을 선보였고 피날레에는 그의 대표작인 '르 스모킹 수트'를 입은 모델들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2002년 구찌그룹(Kering)에서 이브 생 로랑을 인수했고, 2008년 6월 1일, 그는 뇌종양으로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예술 작품을 패션에 접목시키다.
이브 생 로랑의 컬렉션은 몬드리안의 작품을 접목한 드레스와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앤디워홀 등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컬렉션은 센세이션 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몬드리안 드레스는 1965년 컬렉션 106작품 중에서 26개의 작품에 접목하여 기하학적이고 심플한 라인의 추상화를 세련되고 모던한 룩으로 표현했다.
◆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브 생 로랑의 후임으로는 알버 앨버즈, 톰 포드, 스테파노 필라티, 에디 슬리먼 등 차례차례로 바뀌었으며 그중 기억해야 할 한 사람은 프랑스 태생의 천재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이다. 에꼴 뒤 루브르에서 역사와 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2012년 이브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돌아와 브랜드의 로고를 '이브 생 로랑'에서 '생 로랑'으로 바꾸는 큰 혁신을 시도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되살렸다는 평가를 들었다.

현재 생 로랑의 크리에티브 디렉터인 앤서니 바카렐로는 매혹적이고 미니멀한 실루엣을 뛰어난 감성으로 표현하는 디자이너로 생 로랑 고유의 시그니처 아이템들은 존중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디자인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브 생 로랑은 2002년 은퇴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옷차림을 창조했고, 그렇게 나의 시대를 변화시키는데 기여를 했다고 스스로 되뇐다. 유명인이든 평범하든 내 옷을 입어준 모든 여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박연미 디자이너 명장,디모먼트 디자이너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