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주인공인 오피스 드라마들은 그 주요 소재가 일과 사랑에서 나오곤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랑보다는 일 자체가 더 소재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JTBC 토일드라마 '대행사'는 바로 그 일의 세계에서 여성이 마주하는 유리천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얼굴마담으로 세워진 여성 임원의 반격
'최초의 여성 임원 파격 인사.' 가끔 신문지면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등장한다. 대기업에서 여성 임원이 등장했다는 소식은 그 기업의 민주적이고 열린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된 지 오래지만, 채용에서부터 승진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유리천장'을 마주하곤 하는 게 현실이고, 이런 문제들이 공론화되면서 몇몇 기업들은 마치 자신들은 다르다는 듯 그런 '파격 인사'를 내고 이를 홍보한다. 하지만 남성 임원들이 선출되는 것이 굳이 기사화되지 않는 것과 달리, 여성 임원 선출이 기사화되어 화제가 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어쩌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유리천장을 실증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JTBC 토일드라마 '대행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드라마의 문을 연다.
공황장애, 수면장애를 달고 살고 그래서 갖가지 마약성 약들까지 챙겨먹으며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는 일조차 사치로 여기며 투쟁적으로 살아온 고아인(이보영). 그가 드디어 자신이 일하는 광고대행사 VC기획의 제작본부장으로 임명된다. 상무로서 그 회사에서는 유일한 여성 임원으로 발탁되는 것.
만만찮은 반발이 생겨난다. 실력으로는 그 누구도 고아인을 따르지 못하지만, 남성들만의 끈끈한 네트워크가 있어 저들끼리 잘못도 덮어주고 승진도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살던 세계에 고아인의 승진은 모두를 동요시킨다. 하지만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아인을 승진시켜 여성 임원으로 발탁한 데는 이 재벌 오너가의 음흉한 의중이 숨겨져 있다. 그건 재벌가 막내 딸 강한나(손나은)를 낙하산으로 앉히기 위한 사전 포석이다. 고아인을 여성 임원으로 발탁해 회사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얼굴마담으로 쓰고, 연달아 강한나의 낙하산 인사를 무마하려는 속셈.
결국 고아인은 자신이 꿈꾸던 자리에 올랐다는 희열을 느끼기도 잠시, 자신이 얼굴마담에 1년 간 허수아비 상무로 앉게 됐다는 현실에 좌절한다. 좌절 끝에 각성한 고아인은 저들과 전쟁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자신이 가진 '인사권'을 이용해 회사에 파란을 불러일으킨다. 만만찮은 고아인의 반격 속에서 이 그림을 짠 고아인의 상사였던 최창수(조성하) 기획본부장과 고아인과 같은 기수로 경쟁해왔던 권우철(김대곤) 제작1팀장은 반격에 반격을 가하며 드라마의 극적 갈등 구조를 첨예하게 만들어낸다.
'대행사'는 결국 고아인이라는 여성 임원이 보여주는 사투를 통해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굴러가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꼬집으면서, 시청자들에게는 그 시원시원한 사이다 행보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드라마다. 권력과 네트워크를 가져 공고한 저들만의 세계에서 고아인이 가진 무기는 '잃을 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이 자리에 집착할 때, 자신은 자리를 내걸고 저들과 싸워나간다. 가진 게 많아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저들 앞에 고아인은 가진 게 없어 엄동설한에서 거칠게 자라난 들꽃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누가 더 강한가를 드러내겠다는 것. 시청자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다.
◆고아인에 연대하는 또 다른 약자들
고아인의 전쟁은 그러나 단지 유리천장에 가로막힌 여성들을 대변하는 전쟁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스펙과 태생적 빈부의 차이로 인해 갑과 을로 나뉘는 사회 시스템이 드리워져 있다. 임원회의에서 유일한 여성 임원으로 앉아 다른 이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고아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저는 부모도 없고 지방대 출신 흙수저 여자입니다."
그는 어려서 자신을 버린 엄마 때문에 여전히 그 정신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금수저는 아니라도 적어도 바람막이가 되어줄 흙수저라도 있었으면 했던 시절을 무수저로 보낸 고아인(이름 자체가 고아인이다)은 버려질 게 두려워 친구 한 명을 사귀기 어렵게 치열하게 살아내며 지방대를 졸업했고 이 광고회사에 들어와 집착적으로 일을 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 사회 시스템은 '실력'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고, 기득권의 네트워크로 이뤄진 여러 선들에 의해 나눠져 평가하는 부조리를 갖고 있다. 부모가 누구냐가 중요하고, 지방대냐 명문대냐에 따라 성공의 상한선이 그어진다. 게다가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성차별까지 더해진다. 차별은 다양하지만 그 모든 걸 결정하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바로 '태생'이다. 어떤 수저를 갖고 태어났는가가 모든 차별의 뿌리로 작용하는 것.
그래서 이 드라마는 고아인이라는 '무수저'와 강한나라는 '금수저'를 대척점으로 세워 놓는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버텨 지금의 위치에 오른 고아인과 달리, 부모 잘 만나 SNS만 하며 살아온 강한나는 첫 회사 출근에 상무 자리를 갖고 등장하고 오너가라는 이유만으로 VC기획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 직원이 로비에 나와 환영인사를 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환영인사를 보는 임원들과 직원들의 시선이 같을 수 없다. 임원들은 어떻게든 오너가에 잘 보이려 고개를 숙이지만, 직원들은 손으로는 어쩔 수 없이 박수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반감을 갖기 마련이다.
고아인이 그 자리에서 강한나와 악수하며 직원들이 모두 듣는 자리에서 회사 생활 자체가 처음 아니냐며 이렇게 말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모르는 거 많으실 테니까 앞으론 물어보면서 일하세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시키지 않은 일 하다가 괜히 사고치지 마시고." 그건 오너가를 비롯한 그를 비호하는 임원들과 선을 긋고, 자신과 직원들을 하나로 묶어내 이제 저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겠다는 신호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진짜 움직이는 건 누구인가
'대행사'는 이처럼 실력이 없어도 가졌다는 이유로 군림하는 세상의 갑들과, 실력을 갖고 실제로 일을 하고 있지만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저들에게 갑질 당하는 세상의 을들을 나눠 놓는다. 그리고 질문한다. 과연 세상을 진짜 움직이는 건 누구인가 하고. 자본화된 세상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건 마치 자본을 쥐고 있는 저들이라고 이야기된다. 그래서 저들은 마치 그 모든 걸 자신들이 한 것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 스포트라이트 밑에는 저들이 군림하고 이용해먹고 결국 버려진 무수히 많은 보이지 않은 진짜들이 존재한다. 마치 고아인처럼.
물론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얼굴마담 혹은 허수아비 취급하지만,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게 누군가라는 걸 무수한 을들이 증명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건 저들이야말로 얼굴마담이고 허수아비라는 증명이 아닐까. '대행사'는 이 역전이 가져올 사이다를 예고한다. 가난해서 혹은 육아 같은 현실을 마주한 여성이라서, 또 지방대 출신이고 이렇다 할 스펙이 없어 연결될 줄이 없다는 이유로 중심에서 밀려난 변방의 을들이 자신들은 결코 없는 것처럼 살아가야할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이들은 증명하려 한다.
그러고 보면 '대행사'라는 이 드라마가 차용하고 있는 광고대행사 역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실상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주역은 자본가들이고 그들의 돈에 의해 일을 대행하는 이들로 굴러간다. 광고주를 신으로 여기고 그들을 대행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하는 광고대행사라는 직업은 그래서 이러한 시스템이 가장 은유적으로 잘 드러나는 곳이 아닐까. 물론 드라마는 광고주가 아닌 광고를 실제 만드는 크리에이터들이 존재한다는 걸 강변하고 있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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