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김건표 교수의 '김건표의 인세이셔블 연극리뷰'가 매주 수요일 연재될 예정입니다. '인세이셔블(Insatiable)'은 '채워지지 않는' 혹은 '끊임없는' 이라는 뜻으로, 연극의 특성과도 잘 부합합니다. 순수 예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요즘, 전국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는 연극의 리뷰로 그 가치를 지켜나가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엄마 시신을 백골이 되도록 2년 넘게 방치하고 살던 40대 딸이 구속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연금 때문이었다. 중증 노모를 돌볼 수 없어 극단적인 시도를 하는 사례는 뉴스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난다. 유교 사회에서 장자(長子)와 장남의 역할은 집안의 대(代)를 잇고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한국사회 분위기는 '핵가족 시대'로 붕괴 되고 있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치매, 중증 노인질환으로 이들을 돌봐야 하는 역할은 장자에서 장녀로, 특정 성별의 책임과 의무를 떠나 돌봄 노동은 노인복지의 시스템과 사회제도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일본 사회의 노인돌봄 제도인 '개호'(介護) 문화와 대(代)를 이어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장녀사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연극<장녀들>(프로젝트 아일랜드, 드라마터그 배선애 연극평론가)은 총 3부(집 지키는 딸, 퍼스트레이디, 미션)로 구성하고 있는 시노다 세츠코의 소설이다.
연극은 초고령화 사회 치매와 중증노인질환으로 부모를 부양(扶養)하며 살아가는 장녀들의 삶과 노인 돌봄 사회복지 제도와 가부장제도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다. 1부 <집 지키는 딸>은 치매에 걸린 엄마를 부양하고 돌봐야 하는 장녀 나오미(이도유재 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2부 <퍼스트레이디>는 비혼주의자인 게이코(김나연 분)가 당뇨와 신장 질환을 앓고 있는 엄마를 돌보며 지역사회에서 저명한 의사인 아빠의 퍼스트레이디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서지혜 연출이 공연텍스트(소설, 희곡)를 발견해 내는 안목이 좋다.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고독한 목욕>…등을 보면서 희곡을 발굴해 무대로 명료하게 찝어내는 감각이 있다는 것은 연출의 상당한 독서량에 있는 것 같다. 이 작품도 연출이 각색한 작품으로 공연 전부터 전석 매진으로 작품 관심을 높였다. 객석은 60~70대로 보이는 여성 관객들도 상당수였고 옆 좌석 한 관객은 작가의 경험을 소설로 녹여내고 있는 연극을 통해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장녀들의 삶과 무게감에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듯 해 보였다.
◆연극 <장녀들>이 시대의 가족과 장녀사회
노모를 돌봐야 하는 장녀 나오미(이도유재 분)는 이혼하고 외동딸(유키) 하고도 떨어져 지낸다.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치매에 걸린 엄마를 부양하며 살아가는 장녀 나오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1부에서 골다공증과 치매에 앓고 있는 엄마 마츠코(김화영 분)는 환시(幻視)와 환청(幻聽)을 보이는데 극적인 사건을 연결해 주는 서사의 장치(언니 유키의 어린 시절, 방화, 나오미의 직장 문제)로 연결된다.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직장을 그만두라고 하고, 자신을 돌보며 집을 관리하라는 식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노모를 돌보는 나오미는 뉴스를 통해 직장이 불법 운영으로 몰락한 것을 듣게 된다. 마츠코는 아내가 행방불명된 뒤 장인의 데릴사위가 되어 살아가는 신도의 집을 방화하고 화염으로 휩싸여 발견된 시체는 몇 년 전 행방불명된 아내로 밝혀져 '부모 돌봄'으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여자(장녀)들의 재산을 계획적으로 편취하려는 범행으로 드러나게 된다. 치매와 환자의 환시와 환청의 예지력은 죽음의 순간에도 딸을 보호하려는 엄마의 애잔한 모성애를 보이고 어린 시절 언니(유키)가 죽은 뒤 언니를 대신해 장녀로 살아온 무거운 삶이다. 환영으로 엄마 곁을 분신(分身)처럼 배회하는 것도 어린 시절의 언니(장녀) 유키다. 나오미의 여동생(시마무라 마유코)한테 방화 사건은 정치인 남편의 출세를 막는 장애물이고 나오미가 살아가는 현실(초고령화 시대의 노인복지와 사회시스템)의 미래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정치인의 민낯이다.
2부는 당뇨와 신장염 말기를 앓고 있는 엄마(강애심 분)를 모시고 사회에서 존경받는 의사인 아버지의 퍼스트레이디로 살아가는 비혼주의자 게이코 (김나연 분)의 이야기다. 15분의 인터미션 후 2부 부터는 강애심 배우의 연기로 극의 분위기는 동적(動的)으로 전환되면서도 게이코와 엄마의 삶을 바라보는 내내 먹먹해진다. 평생을 자녀들과 남편 뒷바라지로 헌신해온 한 엄마의 삶은 병을 얻은 뒤에도 아내의 당뇨와 신장염 말기를 일반 환자처럼 대하는 남편, 성공한 아들한테 엄마의 중증은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불편함이다. 아내의 치료는 살려야 하는 절박함이 아니라 환자로 받아들여야 할 삶이다. 비혼주의자인 딸 게이코는 상공회의소 회장이 소개 시켜주는 도원회관 장남과 결혼을 시켜 권력의 부를 축적해야 하는 도구이며 자선 음악회는 아내도 살릴 수 없는 인간의 위선들이다. 자식과 남편으로부터 그 어떠한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 없는 엄마는 당뇨에도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폭식을 하고 음식과 식단조절을 하며 엄마를 돌보는 게이코의 투쟁적인 고단한 삶의 시간이 장면으로 비추어지고 신장 투석을 하며 "이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누가 신장을 줬으면" 하는 엄마의 절규에 게이코는 신장 한쪽을 내주기로 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반대한다. 평생을 병원을 지키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남편과 가족들 뒷바라지를 견뎌온 엄마의 삶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떠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절규이다.
◆소설의 입체화, 서지혜 연출의 무대 구조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소설을 무대화한 공간의 구조와 배치, 두 편의 이야기를 공간으로 묶는 방식이다. 나오미와 게이코의 이야기를 일본식 구조이면서도 현대적인 목조 주택의 한 공간으로 설정한다. 무대는 가옥의 내부와 병원, 거리, 카페, 영화관 등으로 장면전환이 이동되고 조명과 전환 효과를 주지 않으면서도 각기 다른 장소에서의 대화와 상황들을 드라마의 교차편집처럼 분위기를 생산적으로 분할시킨다. 공간을 입체적인 장면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시공간의 소설의 풍경들을 1~2초의 오차 없이 흐름을 깨지 않고 장면을 연결하는 퍼즐식 무대 구조가 180분 동안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연출의 치밀한 계산과 무대를 전환하는 무대 뒤 스텝들과 배우들의 상당한 연습량도 느껴진다. 두 이야기를 동일한 삶의 구조로 밀어 넣은 것은 장녀로, 비혼주의자로 무언의 책임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나오미와 케이코의 희생과 병든 두 노모가 살아온 시간도 딸들에게 대물림되는 희생의 시간이다. 또한, 초고령화 사회의 노인복지와 제도의 문제는 장녀로 장자로, 가족으로 대물림되어 희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역할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무대의 현대식 목조가옥은 살아가야 하는 행복한 집이 아니라 치매와 중증 노인 질환으로 죽어가야 할 집이다. 마치 이들의 외로운 투쟁과 삶은 국가와 제도로부터 소외된 삶이다. 집은 인간과 가족을 짓눌러 버릴 것 같은 무게로 버티고 있고 그 안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나오미의 삶은 거대한 가옥의 무게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외로움으로 투영된다. 국가도, 사회적인 시스템도, 의사의 진단도 나오미에게는 위로가 될 수 없는 고립된 삶이며 신도(남동진, 최무인분)처럼 이들의 재산을 노리는 범죄가 들끓는 세상이다. 현대식 목조가옥은 거대한 사회구조와 가족으로 부터 고립되어 짙누르고 있는 무게감이다. 넓은 주택에서 두 사람(나오미와 노모 마츠코)이 살아가는 삶은 사회제도의 소외 속에서 고립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는 두 이야기를 동일한 사회구조의 현상으로 관통하는 연출의 구현방식이다. 서지혜 연출은 소설에서의 각기 다른 게이코와 나오미의 삶을 동시대 현재의 시간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연결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택한다. 두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되는 공간의 배치와 구조는 동일한 사회구조에서 일어나고 있는 초고령화 사회의 현재의 모습들이다. 연출은 이러한 사회현상에서 그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삶의 소외, 고독, 고립 들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 작품에서 서지혜 연출의 양식화된 연극적 미장센을 돋보이면서도 아쉬운 장면들이다. 노모의 돌봄으로 지쳐가는 나오미가 심리적인 압박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영화관을 찾는다. 이 장면에서 소설의 묘사와는 다른 연출의 방식을 취한다. 나오미는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하고 관람객들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동일한 시선과 움직임으로 영화 장면의 분위기를 드러내는데 그 군중의 틈으로 나오미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무표정한 시선들을 들어낸다. 연출은 이 장면에서 군중과 제도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된 장녀 나오미의 심리적인 무게의 내면성을 들어낸다. 이어 2부 퍼스트레이디에서 거리의 카페를 찾은 게이코와 1부의 나오미를 그 군중 속으로 두 장녀의 삶의 무게감을 교차시키면서도 노모를 부양하고 살아가는 사회의 장녀들의 심리적인 내면성을 들어내고 있다. 초고령사회에서 노모 부양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는 것인가? 라는 사회 담론을 형성하면서도 관객들 대다수가 이 두 장면을 통해 게이코와 나오미의 동일한 내면의 감정들을 공감하기에 충분하다.
세 번째는 어린 유키의 존재다. 1부 <집 지키는 딸들>에서 노모 마츠코는 환시와 환청에 시달린다. 유키는 두 사람이 존재한다. 마츠코의 손녀이자 나오미의 딸 유키와 마츠코 어린 시절에 죽은 언니 유키다. 같은 이름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마츠코는 환영으로 존재하는 어린 유키와 대화를 나누고 나오미의 회사와 신도의 범행 계획을 미리 예견한다. 나오미는 이혼 전 이 집에서 잠시 살았던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유키인줄 안다. 손녀 유키는 이혼 후에도 직장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엄마를 8개월 만에 만나게 되고 나오미 삶의 시간이 흐를수록 연출은 멈추질 않고 환청과 환시로만 들리고 보이는 어린 유키를 무대로 소환한다. 마츠코와 나오미의 시간이 흐를수록 유키는 더욱 선명한 존재로 마츠코의 곁을 분신처럼 배회한다. 방화 후 마츠코의 병실에서 앨범을 발견하고 그 사진 속에서 두 살 터울의 엄마와 언니 유키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발견하게 되면서 언니가 죽은 후로 장녀로 살아온 엄마의 고단한 삶을 드러낸다. 대를 이어 장녀의 무게감을 버텨온 나오미의 현재의 시간과 동일한 시간으로 포개진다.
◆섬세한 연출로, 배우의 연기로 들려주는 우리 사회 이야기
장녀 유키의 존재의 반전은 장녀들의 사회를 바라보는 충격이다. 죽어서도 장녀의 역할을 동생의 환영으로 나타나 가족을 지켜내는 유키-마츠코-나오미-손녀 유키로 이어지는 세대에서 장녀의 역할은 여전히 무거우면서도 소설과 연극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투영하고 있다. 마츠코한테 손녀 유키는 늘 곁에 있는 존재이면서도 부양의 의무를 가족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는 MZ세대들이 바라보는 현대사회의 장녀와 장남의 세대 문화이다. 가족과 노모 부양의 책임과 역할이 초고령사회가 되면서 대를 잇는 가족의 의무에서 사회제도의 책임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며, 핵가족 시대와 초고령사회의 현상들이다. 마츠코의 언니 유키는 대를 이은 책임과 무게의 고리를 끊어 낼 수 없는 장녀의 삶이면서도 다시 핵가족 시대에 어린 유키가 태어나고 있는 미래 유키의 시대다. 가족의 부양 의무를 장녀의 무게감과 가족의 핏줄로만 견딜 수 없는 시대이며 죽어서도 동생 곁을 배회하며 가족을 지켜내는 장녀 유키와, 나오미, 마츠코 장녀의 의무는 외롭고 고립된 싸움이며 유키가 살아가야 할 미래는 가족도, 사회도 100세를 견디기에는 여전히 불안한 시대이다.
초고령화 사회의 일본의 노인 돌봄 사회제도와 대를 잇는 장녀들의 현실적인 삶의 무게감을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개호(介護) 소설로 읽히고 있는 <장녀들>을 서지혜 연출은 소설의 묘사에서 무대의 형상화로 시공간과 감각적으로 배치하며 미래 한국 사회의 노인 돌봄의 사회적 제도와 핵가족 시대에서 부모를 향한 장자 문화의 가족의 역할을 진지한 사회 담론으로 던지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23명이 대규모 출연 배우들의 연기와 장면의 변화되는 무대의 구조에서도 장면을 앙상블과 안정된 연기로 극 중 인물을 살려내고 있는 김화영, 강애심, 김귀선, 최무인, 남동진, 정선미, 이도유재, 김나연 배우들의 역량도 작품의 관심을 높이고 극을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효과도 컸지만, 산수유 류주연 연출은 극 중 병원 사무장 (하시오카)로 분하면서 마츠코의 당뇨병 진단을 타인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는 노쇠한 캐릭터를 잘 들어냈고, 창작산실 <미궁의 설계자> 공연 준비하고 있는 김지은 대표도 작은 역할이면서도 등장하는 장면에 역할을 충실하게 표현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소 평면적인 서사구조를 연출의 방식으로 더 확장해 연출적인 메시지를 더 분명히 하면 어떨까. 특히 마츠코와 나오미의 두 사람의 시선이 겹을 이루는 장면과 영화관 장면도 극의 마지막 부분에 두 인물을 한 공간의 장면에서 각기 다른 장녀와 퍼스트레이디의 삶의 내면을 확장해 교차시키고 언니 유키의 존재의 반전을 좀 더 극적으로 설계해 본다면. 서지혜 연출이 현재 배치한 장면으로도 그 의미는 넘쳐나지만 한 발짝 더 들어가 사회적인 메시지가 선명해지고 서지혜 방식이 분명해질 것 같다. 작품에서 드라마터그를 맡은 배선애 평론가는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고 '내가 엄마를 돌봐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머물지 말고 '늙은 나는 누가 돌봐줄 것인가?'로 질문의 방향을 바꾸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연극적인 미학성을 기대할 수 있는 서지혜라는 섬세한 연출과 견고한 각색으로 배우들의 앙상블이 조화(造化)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서지혜 연출가와 극단프로젝트 아일랜드는
2012년 프로젝트아일랜드 창단공연<아일랜드>(혜화동1번지)를 시작으로 이 작품은 그해 밀양공연예술축제 젊은 연출가전에서 남동진, 최무인 빼우가 연기상을 공동수상했다. 이후 일본 Sapporo TGR(Theater Go Round)페스티발에서 대상과 훗카이도 연극재단 올해의 연극 BEST 3에 선정되면서 극단의 대표작품이 되었다. 이후 서지혜 연출은 <황금밥 식당>(2015),<현장검증>(2015)를 선보이면서 연출의 감각성을 알렸고 <일상광기에 대한 이야기>(2018)로 제5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기상(남동진), 월간한국연극 선정 공연베스트7, 공연과 이론 작품상을 비롯해 제39회 서울연극제 대상, 연출상을 수상했다. <고독한 목욕>…<장녀들>로 이어지는 작품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서지혜만의 연극적인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다.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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