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인생 뭐 별거 있나,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이런 생각은 주로 잠 안 오는 밤에 찾아온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소규모 인생 계획들, 커피 삼천사백스물세 잔, 후추와 소금 약간, 대통령 여럿, 쓰라렸던 백수 시절, 21그램도 채 안 되는 키스와 연애, 그리고 무수한 실패. 그게 특별할 것 없던 내 인생사용법이었다. 아들이 생기면 아이에게 야구 글러브를 사주고 둘이 캐치볼을 해야지, 했지만 그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사느라 바빴던 탓이라는 변명은 비겁하다. 거위처럼 어기적거리며 변명이나 늘어놓는 인생은 비루하다.
나이 드니, 그토록 혼란에 감싸였던 인생의 전모가 또렷하게 보인다. 시간이 완전함을 가늠하는 인생의 시험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인생 처음의 시련은 벌에 쏘인 것이다. 설마 여섯 살에 통렬한 아픔 속에서 인생이 녹록지 않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아니다. 벌 쏘인 턱이 금세 부풀고, 마치 불에 덴 듯 따끔거렸다. 외손자를 들쳐 업은 외할머니는 찐 옥수수를 물려주며 달랬다. 벌에 쏘인 그 선연한 통증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요즘 들어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 엄마라고 알았던 외할머니 얼굴을 자주 떠올린다.
평생 시 쓰기에 매달렸다. 열다섯 살 때 김소월 시집을 읽고 그 운율을 흉내 내어 시를 적었다. 학생 잡지 '학원'에 뽑혀서 활자화된 시를 길거리에서 여러 번 읽었다. 그 어린 시절 내가 쉰 해 동안이나 시를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으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시를 환대하고 정중하게 대했다.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라 여기고, 급류 같은 사나운 세월을 시라는 난간을 붙잡은 채 건너왔다. 시가 아니라 다른 일을 그토록 열심히 팠더라면 삶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스물일곱 살에 출판사에 사표를 내고 창업을 했다. 1인 출판사였다. 혼자 책상에 엎드려 코를 박고 기획과 원고 교정, 표지 디자인을 다 처리하고 인쇄소며 제본소를 쫓아다니며 제작 감리를 봤다. 운 좋게도 창업 직후에 낸 책이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며 직원을 두어 명 뽑고 사무실을 넓혀 이사를 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들을 맘껏 펴내는 동안 출판사는 번창해서 직원이 서른 명으로 늘고, 창업 십 년 만에 강남에 사옥을 지었다. 그게 내가 일군 사업의 정점이자 전성기였다. 필화 사건으로 구속되고, 두 달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서 출판사 폐업을 결심했다. 열다섯 해 동안 출판 편집자로 책 만들며 보낸 세월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인생 후반부엔 제주도에서 작은 서점이나 꾸리며 살고 싶었다. 은둔 거사로 살며 먼 데서 온 젊은 벗들과 담소하고 오후엔 바닷가나 걷고 싶었다.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차선으로 시골에서 영농 후계자로 살려는 야무진 꿈을 꾸며 경기도 남단에 집을 지었다. 봄, 가을마다 물안개가 집과 마당을 삼키는 시골에서 나는 처절하게 외로웠다. 낮엔 나무시장에서 사온 유실수와 관상수를 부지런히 심고, 밤엔 안성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물안개와 고독을 견뎠다. 가끔 벗들이 들고 온 붉은 포도주나 동네 슈퍼에서 사온 좁쌀막걸리를 한잔씩 마셨다. 어둠 속에서 고라니나 너구리가 집 마당을 서성거리다 기척 없이 사라졌다. 그 동물들은 야생이었다. 십오 년 뒤 영농 후계자라는 난망한 꿈을 접고 시골을 떴다.
돌아보니 인생이란 미친 엄마가 품고 다니는 태아 같다. 우연이라는 날개를 달고 붕붕거리는 애처로운 인생아! 잘 사는 일이란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 보니 진실의 환한 빛 속에서 사랑하고 슬퍼하며 사는 것, 바람에 펄럭이며 마르는 빨래를 지켜보는 시간을 갖는 것, '일하는 육체와 창조하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평생 읽는 자이자 쓰는 자로 살았다. 내 인생사용법에 실수와 오류가 없었다고 우길 수는 없다. 그러나 엉터리로 살지 않았다는 자부심조차 없는 건 아니다. 내 귀는 바흐를 듣고, 내 눈은 권진규의 '붉은 가사를 걸친 자소상'을 보았다. 청년 시절 추앙하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지중해 크레타섬을 찾아가 그의 돌무덤 위에 붉은 꽃 몇 송이를 바쳤다. 내 인생 추는 갈망과 현실 사이 한가운데에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그게 내 인생사용법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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