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없는 첫 설날, 모처럼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삼촌은 훌쩍 자란 조카가 마냥 귀엽고, 사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먹음직한 산적이 노릇노릇 익어가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주방에 퍼진다. 어느 때보다 푸짐한 밥상을 둘러싸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할아버지 할머니, 개손주 왔어요" 정서진 씨의 반려견 세 마리도 조부모 집을 찾았다. 이슬이, 코난, 새리는 서진 씨 부모님에게 금쪽같은 개손주다. "명절 쇠러 갈 때마다 애들을 꼭 데려가요. 친척들이 예뻐 해주니 같이 안 갈 이유가 없죠"

◆개한복 입은 개손주 "할머니 할아버지 세배 받으세요"
형형색색 색동옷 입은 개손주의 등장에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서진 씨는 일주일 전부터 가격비교를 해가며 반려동물용 한복 세 벌을 구입했다. "작년에 사 놓은 게 있어 올해는 세뱃돈용 복주머니만 사려고 했는데,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신상이 너무 많은 거 있죠. 식구들 만나러 가는데 예쁘게 가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가격은 세 벌에 8만 원. 삼 남매인 만큼 세트로 구매했다. 반려동물용 한복은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대체로 2만~3만 원대 수준인데 맞춤형으로 수제 제작한 일부 브랜드 상품은 10만 원을 넘기도 한다. "내년에는 돈 더 많이 벌어서 우리 애들 설빔 더 좋은 거 입혀야죠" 부모 마음에 비싼 옷을 입히고 싶지만 아이가 셋이기에 욕심은 접어둔다.


15살 이슬이와 11살 코난이는 벌써 10여 년째 할머니 댁에서 설을 보낸다. "저희 부모님은 원래 강아지를 별로 안 좋아하세요. 딸인 제가 데리고 오니까 싫어도 그냥 내색을 안 하실 뿐이었죠. 심지어 이슬이와 코난은 남자아이들이라 그런지 정을 더 못 붙이시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올해로 4살이 된 새리를 입양하면서 집안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막내딸 새리는 그야말로 할아버지 할머니 껌딱지다. 옆에 꼭 붙어서 만져달라고 얼굴을 들이대며 뽀보 세례를 퍼붓는다. 무뚝뚝한 할아버지도 그런 새리 앞에서는 무장해제다. 그러다 결국 작년 설부터 세뱃돈까지 주기 시작했다.

세배 시간이 되자 개손주들은 신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개손주라도 '장유유서'는 지켜야 하는 법. 어른들부터 순서대로 세배하고 개손주들은 가장 마지막 차례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멍석이 깔리자 이슬이와 코난은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뺀다. 그나마 새리가 납작 엎드리는 신공을 발휘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서진 씨 뒤에 숨은 이슬이와 코난을 보고 할아버지는 한마디를 던진다. "으이구, 작년까지는 잘만 하더니 나이 좀 먹었다고 제대로 하지도 않네 녀석들" 그래도 장남 챙겨주는 건 할아버지밖에 없다. 이슬이는 장남이라고 만원을 더 얹어 주셨다. 이모부와 이모까지 지갑을 열자 서진 씨의 표정이 밝아진다. "애들한테 말했어요. 세뱃돈 잘 저금해서 어른 되면 주겠다고요"


◆ 친척들과 즐거운 시간, 떡국 먹고 한 살 더 먹었어요
덕담도 이어졌다. 특히 막내 새리에게는 작년보다 철이 들었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새리는 개손주들 중에 가장 늦게 가족이 된 탓에 친척들과의 교류가 오빠들보다는 훨씬 적었다. 그래서인지 친척들만 보면 짖고 도망가기 바빴다. 하지만 올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친척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버릇도 고쳤다.
첫째 이슬이는 할머니와 이모들이 대화하는데에는 꼭 끼인다.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친척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는다. 사내 녀석이 여자들 이야기하는데 왜 있냐며 핀잔을 줘도 들은 체 만 체다. 앉을 자리가 없으면 무릎에 올려 달라고 낑낑대기까지 한다.



개손주들은 사촌들의 사랑도 듬뿍 받는다. 특히 올해 중학생이 되는 지우는 개손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촌이다. 특히 둘째 코난을 끼고 산다. 11살 코난이에게는 14살 지우는 둘도 없는 사촌누나다. 나이 터울도 크지 않아 짝짜꿍이 잘 맞다. 이 때문에 난감한 상황도 종종 벌어진다. 막내 새리의 질투심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이다. 코난을 예뻐하는 지우에게 가서 자기도 예뻐해 달라고 달라붙는다. 그럴 때면 지우는 참 난감하다.


올해는 강아지 떡국이 준비됐다. 한 가족인데 사람만 맛있는 걸 먹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일반 떡은 찰기가 있어 강아지 이빨에 들러붙을 수 있어요. 그래서 강아지 떡국은 쌀 대신 닭고기로 만들었어요. 닭고기를 잘 쪄서 떡국 떡 모양으로 자르고 육수는 간을 하지 않은 닭 육수나 소고기 육수를 사용했어요"
사람 가족 옆에 개손주들도 떡하니 자리 잡았다. 떡국을 먹어야 비로소 한 살을 더 먹는다는 덕담을 반찬 삼아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바닥까지 긁어먹는 개손주들의 식성에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에는 웃음꽃이 폈다. 그러나 곧장 할머니의 단골 대사가 시작된다. "아이고 내새끼들 왜 이렇게 말랐어" 떡국으로 안 되겠다 싶었던지 할머니는 개손주들이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잔뜩 꺼내왔다. 개손주들은 할머니 옆에서 사과와 배를 실컷 얻어먹었다. 사과나 배는 강아지도 먹을 수 있는 과일로 적당히 주면 괜찮다. 대신 할아버지가 드시는 포도는 강아지가 먹으면 절대 안되기 때문에 조심했다고.
◆ 반려동물들도 명절 증후군 있어요
할머니 댁에서 2박 3일을 보낸 개손주들은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골아 떨어졌다. 집에 들어와서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시원하게 볼일을 본 뒤 깊은 잠에 빠졌다. 누가 보면 제사상 차린 종갓집 며느리인줄 알 만큼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았단다. 3일 정도는 놀자고 보채지도 않고 내리 휴식만 취했다.


실제 많은 반려동물들이 명절 후유증을 호소한다. 설 연휴 기간 장시간 이동으로 멀미를 하거나, 명절 음식을 받아먹고 구토·설사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친척 아이들이 서로 강아지나 고양이를 차지하겠다고 안고 다투는 과정에서 떨어드려 골절 등 외상이 발생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애견호텔에 맡겨진 일부 강아지들은 불안 증세를 보여 명절 이후 동물병원을 찾는 경우도 많다.
대한수의사회에 따르면 설 연휴 동안 전국의 총 318개의 동물병원이 문을 열었다. 대구 북구의 한 동물병원 관계자는 "항상 명절 이후 손님이 급증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한 강아지는 낯선 사람들의 지나친 손길 때문에 컨디션 저하로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는 증세를 보이기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대명절 설날이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이슬이, 코난, 새리도 명절 증후군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다. "올 설도 우리 개손주들과 즐거운 시간 보냈네요. 친척들 단체 채팅방이 있는데 개손주들 보고싶다는 글이 계속 올라오네요. 반려동물과 함께 보내는 명절. 이렇게나 즐겁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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