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바에 위치한 사라사 호텔 309호에 누웠어. 그저께는 토어로드를 따라 북쪽에 있는 기타노이진칸 거리를 걸었다네. 가파른 산 아래 칠 벗겨진 목조주택들. 총영사의 집도 어느 독일인의 붉은 벽돌집도 그저 서양인이 살았던 언덕이었더라고. 외려 낡고 익숙해서 어질러진 생각들이 편안했어. 검은 알맹이를 매단 올리브 나무와 희고 붉은 산다화가 생소하더군. 언덕 위 텐만 신사에서 마주한 고베항은 마른 나뭇잎처럼 생기가 없더라.
나는 왜 이 땅에 이제야 왔을까. 한몸 같았던 네가 수십 년을 머문 곳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가만 생각해 봤어. 너와 나를 끌어당겼던 구심점이 뭘까를. 같은 동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이름(한자까지 동일)을 달고 가장 높은 집에서 마주 보며 산 거. 시도 때도 없이 메아리로 돌아오던 이름 때문만은 아닐 거야.
오늘은 느지막이 일어나 기차를 타고 교토에 다녀왔어. 순간 어느 골목 배롱나무가 있는 특이한 외관의 2층 목조주택 앞에서 걸음이 멎는 거야. 네가 30년을 살았을 그 집일 수도 있겠단 막연한 생각. 한뼘 거리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담배 연기 자욱한 둥근 테이블에 앉았지. 희끗희끗한 머리를 틀어 올린 노인이 내린 이 커피를 너도 마셨을까. 어디선가 후각을 자극한 카레 향이 났고 눈이 큰 청년과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애가 대문을 나오는 거야. 뭔가 훅 내리쳤는데 뭔지 모르겠어. 자식은 뭘까.
여행이랍시고 떠나와서는 걸핏하면 부딪친 며칠. 좀체 간극이 좁혀 지지가 않아. 곳곳에서 이해충돌이 일어나더라니깐. 딸은 카페들이 즐비한 신사이바시에서 쇼핑하다가 다코야키나 라멘을 먹자, 난 그저 호텔 근처에서 삼겹살이나 먹자는 주의고. 에비스바시 지역의 트레이드마크라는 에자키글리코 제과점 옥외 간판 앞에서 굳이 줄까지 서서 사진을 찍을 이유도 모르겠더라고. 하긴 이 푸념조차 네게 미안해지는구나.
이따금, 아니 자주였어. 남편이 출근하고 겐타와 리츠코를 등교시킨 빈집에서, 줄담배를 피우면서 들려주던 네 목소리. 전화선 너머 레인지후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오곤 했지. 그러고는 '천국의 책방' 영화 이야기를 했잖아. 설정처럼 일찍 죽은 이들은 천국에서 다시 태어나 100살을 다 채우고 떠나게 될지 궁금하다고.
어느 날이었던가. 네 목소리는 굉장히 들떴고 이유를 묻자 드디어 2층 목조주택 리모델링 공사가 끝났다고. 마당 넓어 좋다고 했지. 붉은 칸나를 사고 배롱나무 손질할 전지가위를 사서 집으로 오는 길이라고. 언제 한번 일본에 다녀가라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를 가시덤불에 가둔다네.
몇 해 전 너의 죽음 이후 죽음과 상실에 대한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를 봤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 림보역에서 7일을 머물며 추억하고픈 순간을 살다가 떠난다는 이야기. 엄밀히 말하면 청천벽력과 암흑천지도 잠깐 이어지다 세상은 여전하다로 귀결되더라는 거.
너와 나의 마지막은 어느 해 사월이었어. 벚꽃 만발한 강둑을 거닐고 돌아간 후 울리지 않던 전화. 너의 안부를 혼자 추측하다 부음을 들었을 땐 이미 벚나무 잎에도 물이 들었더라고. 영원불변한 것에 대한 절망보다는 상실감. 불쑥 찾아드는 폐허감. 그렇다고 신을 부정하거나 파괴할 생각은 없어. 때론 상처 부위를 응시하지만 참혹해지지는 않더라고. 아마도 너로 인해 얻은 선물일 거라 믿는다네.
이승과 저승의 중간역인 림보역의 직원들이 묻잖아. "영원히 머물고픈 순간이 당신 인생엔 있습니까?"라고. 내 오랜 친구는 어떤 순간을 선택했을까. 친구야 너의 백 살은 아직 멀었어. 그러니 지금쯤 해당화 지고 눈 내리는 바닷가 언덕이나 천국의 어느 도시를 걷고 있었으면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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