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영화 대본집 인기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전기밥솥에 엄마 목소리를 녹음을 해요. 치익… 얘야 밥 다 됐다. 언능 와서 밥 먹어라. 그런다고 해서 엄마가 해 준 밥맛이 나지는 않는다 이거야." 흥행 돌풍을 이어가는 고(故) 강수연 배우의 유작 '정이'(Jung_E)에 나오는 대사이다. 휴먼 드라마 요소가 잘 드러난다. 다시 이 대사를 읊조린다. AI(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역할과 존재론적 의미는 무엇인가? 순간, 철학의 숲을 더듬게 된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고,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고." 관객들이 꼽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옥같은 대사들이다. 마음이 찌르르하고, 가슴이 풀어진다. 이 영화에는 화려한 볼거리나 기교가 없다. 고즈넉하면서도 파격적이다. 베드신 없이도 에로틱하다. 대사와 지문이 영화를 몽환(夢幻)의 새벽으로 끌고 간다.

서점가에서 영화·드라마 대본집이 인기를 끌고 있다. 영상 시대인 만큼 극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출판 전문가들은 '팬덤'(fandom)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청년 세대는 끼니는 건너뛸지언정 여가와 취미 활동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와 영화를 응원하는 데도 마찬가지. 대본집이 굿즈(goods·특정 연예인이나 브랜드가 출시하는 기획 상품) 반열에 떡하니 오른 것이다.

종영한 지 오래된 영화나 드라마의 대본이 출간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판매 순위가 상위권이다. '나의 해방일지'를 통해 '구씨 신드롬'과 '추앙' 열풍을 일으킨 박해영 작가의 전작 '나의 아저씨' 대본집이 대표 사례이다. 드라마가 끝난 지 4년 만에 출간됐는데도 많이 팔린다. 지난해 4월엔 20년 전 개봉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특별판 각본집이 나왔다. 출판 전문가들은 "작가의 처음 설정과 방송(영화)에서 다르게 표현된 부분을 비교해 읽는 것도 대본집을 읽는 쏠쏠한 재미"라고 한다. 아무튼 '영화(드라마) 보기' 못지않게 '영화 읽기'가 유행이다. 영상의 감동을 문자로 톺아보고, 되새김한다. 영화를 더 만끽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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