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 북한산 자락에 있는 유석(維石) 조병옥 박사 묘소 입구에 있는 글귀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 주역인 조 박사는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정치인이다. 지금으로 치면 경찰국장, 행정안전부 장관 등을 역임한 후 이승만 대통령의 대척점에서 야당 활동을 한 조 박사는 1960년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한 바 있다.
같은 문구를 다시 접한 것은 천안에 있는 조 박사 생가 입구. 특별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글이 유명 정치가의 생가와 묘소에 게시된 이유가 궁금했다. 조 박사는 야당 지도자 시절 이 대통령의 독재를 막기 위해 국회 보이콧 등 강경 투쟁을 요구하는 당내 분위기와 달리 협상이 중요하다는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예의 '빈대' 발언이 나온 배경이다. 당내의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그는 협상과 타협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유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노련한 정치가요 협상가라는 기록만은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지지자들은 지난 토요일 서울 도심에서 이상민 행안부 장관 파면, 김건희 여사 특검 등을 외치며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그에 앞서 민주당 의원 40여 명은 국회 본청 앞에서 밤샘 농성을 벌였다. 농성장에서는 "이게 진짜 야당"이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주장의 당부를 떠나 일단 모양새를 이해하기 어렵다. 오래전 농성과 장외집회가 낯설지 않은 때가 있긴 했다. 당시 주인공은 무력한 소수 야당이었다. 반면 지금 민주당은 국회를 완벽히 '장악'한 야당이다.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서 '국회주권'(Sovereignty of Parliament)이라는 얘기까지 나오는 영국 의회 정도의 위상을 가진 정당이다.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나 야당 의원 체포동의안 무력화는 식은 죽 먹기이며, 대통령·장관 탄핵을 수시로 들먹이고, 새로운 행정부가 원하는 정부조직법은 물론 법률 하나, 예산 한 푼도 민주당의 허락 없이는 통과가 불가능하다. 엄동설한에 거리로 나서야 할 이유가 없다. 국민을 설득할 명분이 있다면 장관 탄핵, 특검 등을 통과시키면 된다. 장외투쟁은 결국 이재명 대표 방탄을 위한 위력 시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셈이다.
과거 야당이 장외투쟁을 하면 수많은 국민이 자발적으로 함께했던 시절이 있었다. 동원도 독려도 필요 없었다. 세력은 미약했지만 공감하는 다수의 국민이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한 결과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었다. 동원 인원을 할당하고 출석 체크를 하는 자체가 장외투쟁이 국민과 동떨어진 행위임을 말하는 것이다. 거대 야당의 장외투쟁에서 짐작할 수 있는 건 또 있다. 검찰 수사에 대한 일차적이고 원칙적 대응은 법률적으로 다투는 것이다. 검찰의 조작 수사라면 무죄추정의 원칙, 진술거부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 무기가 얼마든지 있다. 이 대표는 또 자신이 대선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검찰 수사 대상이 된 것처럼 말한 바 있다. 선거 자금 등 대선 과정에서 벌어진 사안이 수사의 중심이라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주된 수사 대상은 이 대표의 성남 시장, 경기도 지사 시절의 범죄 혐의에 대한 것이다. 위력 시위는 이 대표를 옥죄는 검찰 수사에 대한 법률적·정치적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다. 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삼세 번 심리가 가능한 사법부를 믿어야 한다고 조언한 바 있고, 김종민 의원 역시 "사법 문제는 재판에서 결판나는 거지 정치적인 목소리 크기로 결판이 안 난다"고 말한 바 있다.
'빈대 잡으려 초가삼간 태운다.' 당장 마땅찮은 것을 없앨 마음이 앞서 그것이 가져올 위험은 생각지 못한다는 속담이다. 당장 이 대표를 지키려는 불이 민주당을 태우고, 국회와 우리 정치를 태울 위험성을 왜 보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민주당 대표를 지낸 조 박사와 아들 순형, 민주한국당 대표를 지낸 윤형은 '3부자 야당 총수'라는 진기록을 세운 주인공이다. 유석 조병옥 박사와 같은 혜안을 가진 큰 정치인이 그립지만 민주당에 대안이 없다는 말은 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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