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용산 논검(龍山 論劍) 관전기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J.R.R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통해 서양 판타지소설의 토대를 닦았다면 중국 무협소설의 큰 틀을 만든 이는 진융(金庸)이다. 두 사람은 필명을 떨친 시기 또한 비슷해 반지의 제왕은 1954년, '사조영웅문'은 1957년에 첫선을 보였다. 요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라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가(大家)들이다.

진융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등장하는 다양한 설정과 개념들은 이후 나온 무협소설에 널리 차용됐는데 논검(論劍)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강호의 최강자들이 직접 무공 실력을 겨루거나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일컫는다. 물론 초절정 고수들이 모두 만병지왕(萬兵之王)인 검을 들고 대결하지는 않는다.

특히 제3차 화산 논검에서는 아예 비무(比武) 없이 오로지 입으로만 논의한 끝에 서열을 정한다. 재미있는 것은 무림지존급인 이들이 새로운 천하오절(天下五絶)을 뽑게 되는 계기이다. 독자라면 아시다시피 듣도 보도 못한 시정잡배들이 범 앞의 하룻강아지마냥 자신들이 최고수라며 '재롱'을 떤 탓이다.

소설에서처럼 세상을 기만하고 이름을 훔치려는 무리들은 어디든 있게 마련인가 보다. 새 장문인(掌門人·당 대표)과 호법(護法·최고위원)들을 선출하는 국민의힘 전당대회 역시 그렇다. "여기에서 멈추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며 서로 허풍선을 떠는 모습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되짚어 보면 전당대회 여론조사 규칙을 당원 100%로 바꾼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부 총질이나 하는' 전임 당 대표의 당원권 정지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한 강력한 의지였다. 하지만 지난 10일 발표된 컷오프 결과를 보면 당심(黨心)이 민심이 아니라 오히려 민심이 당심이었다.

온갖 암수(暗數)를 써서 경쟁자들을 주저앉힌 것도 역풍의 배경이었다. 이른바 '윤심(尹心) 후보'들이 여론조사 선두에서 밀려날 때마다 용산의 참모들이 전면에 나선 게 화근이다. 비윤(非尹) 후보들은 너끈히 본선에 오른 반면 자칭타칭 친윤 후보들은 현역 의원이라는 강점을 갖고도 지도부 입성에 실패했다.

이쯤 되면 무협 소설의 상투적 클리셰(cliché)들이 떠오른다. 그 중 하나는 선한 주인공은 독이나 암기 등 암수를 쓰지 않고도 상대를 제압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림의 태두(泰斗)인 소림사는 방장(方丈)과 수제자는 뛰어나지만 나머지는 그저 그런 수준이라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다시 하락세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59년 홍콩 일간지 명보(明報)를 창간한 언론인이기도 했던 진융은 생전 인터뷰에서 무림 문파들의 투쟁은 계파 간 갈등이 극심했던 당시 중화권(中華圈) 정치 현실에 착안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대선 승리 딱 1년 만에 치러지는 여당 전당대회 또한 내년 4월 강호의 각 문파가 총출동하는 '천하제일 무술대회'(제22대 총선)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여당은 집권당다운 비전을 보여줘야 무림 맹주로서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

내달 8일 전당대회까지 당권 주자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정도(正道)는 그래도 지키길 바란다. 색깔론이나 대통령 탈당 같은 동귀어진(同歸於盡) 식 공방은 그만둬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는 야당 복(福) 하나는 끝내준다'라고 자위하고 있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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