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불린 검은콩을 시루에 깔았다. 밤낮으로 물을 먹이는 일이 요즘 나의 일과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먹인다는 문장이 걸린다. 단순히 보호나 돌봄을 떠나서 '길을 들인다'가 도사리고 있었다. 물을 먹여 심리적으로 지배를 하는 일. 불현듯 반란과 궐기가 허공을 떠다녔다.
암튼 먹인 물은 사미니 이고 다니는 물동이만 한 시루 안에서 '차르르' 걸러지다 이윽고 '똑똑 탁탁' 남은 물방울을 떨쳐낸다. 자정 무렵이나 새벽녘에 떨쳐내는 물소리를 듣노라면 목탁 소리 진배없다. 수탁 소리인가. 그렇게 올겨울 콩들이 모여사는 작은 절간을 지었다. 검은 장막 안에 가둬 놓고 물을 먹여 길을 들인 것이다. 일주일간의 동안거에 들더니 착한 녀석들이 고깔모자를 벗으며 하얀 혀를 내민다. 외라는 불경은 들리지 않고 하늘을 향해 날름날름 떠드는 입들. 가만히 귀를 내민다.
"가스값이 난리래." "2055년쯤에는 국민연금 기금 바닥 설도 있던데." "이놈아 말조심해 압수수색 들어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코앞인데 대책 없다며." "아휴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니까."
바람 잘 날 없는 시루 밖으로 목을 빼 올린 너희들. 할 말은 그득해 보이는데 어째 부여받은 생이 짧아 보인다. 내일 아침 식탁에 먼저 오를지도. 한 치 앞도 모르는 암둔한 녀석들. 할 말조차 하지 못한 작은 콩들은 여전히 뒤엉킨 시루 속에서 난장판이다. 어쩌다가 두어 끼 굶긴 날에는 새들새들 삐쳐서는 고개를 획 꺾어버리지만 잠시뿐.
그저 물만 먹여도 싱글벙글. 시루 속은 아우내 장터. 내 콩이 크니 네 콩이 크니 서로 잘났다고 콩만 한 것들이 오졸거린다. 물에 잠겨 썩은 콩을 씹은 얼굴, 겨우내 살아났는지 날콩 씹은 상판의 찡그린 얼굴, 오르지도 눕지도 못한 채 껍질만 덮어쓰고 있는 콩. 이도 저도 아닌 틈바구니에서 검은 법복 자락 고스란히 벗어놓고 해탈한 콩.
기고만장하며 설레발 치던 콩나물을 뽑았다. 날름날름 떠들던 입들 닫아걸었다. 언뜻 절망과 희망은 처음부터 이분화되어 있지 않았단 생각이 이 순간에 왜 들까. 같은 말을 두고 A가 말하면 직격탄에 소신 발언이고, B가 말하면 비아냥이거나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웠다고 편파보도 하는 현실.
괜스레 눈앞 콩나물에 미안했다. 나의 잣대로 심판을 하고 있었던 게다. 무럭무럭 성장하여 나물이 된 죄밖에 없었다고, 남들보다 승승장구하여 주인장 비위 맞추었더니 얼간이에 암둔한 녀석들이라는 비아냥거림만 얻었다고. 누군 목숨줄 뽑히는 걸 알면서도 의연히 먼저 일어나서 할 말은 하는 용기를 펼쳤다고 응원하는 이도 있더라는 표정. 항변이라도 하듯 입 닫고 새초롬하게 누웠다. 딴에는 가치실현일 것이고 공양구현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행간에 납작 엎드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숨겨 놓은 채 아침 공양으로 콩나물국이나 끓이고 있는 그대야말로 허수아비가 아니던가.' 허공을 떠도는 말들이 나를 칭칭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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