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측백나무, 2천만년 전 포항에 살았을까

천연기념물 대구 동구 도동 측백나무 숲
천연기념물 대구 동구 도동 측백나무 숲


오고 갈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인지

그 길은 자주 호젓하며

울고 난 사람 같았다.

슬픔이 가라앉아

지난해보다 우뚝 자란

검푸른 측백나무 울타리 일대는

그 울타리 안과 밖이

서로 딸꾹질을 주고받는 듯하다

(하략)

〈시집 『속삭임』, 1998, 실천문학사〉

고은의 시 「측백나무 울타리」처럼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은 뒤안길에 줄지어 서 있는 측백나무 주변은 호젓하다. 대구 도심에서 가까운 대구동산병원 주차장 가장자리와 신명고등학교 담장, 성모당, 두류공원 주변에는 커다란 측백나무가 매끈한 몸매로 하늘을 떠받치듯이 사시사철 제자리를 지킨다. 시멘트 담장을 쌓기 전에 울타리로 심어졌던 나무라서 하나같이 이웃 땅과 경계 지점에 서 있다. 시골의 오래된 학교나 면사무소 뒤편, 관사 담장 안에도 측백나무가 서 있었다.

천연기념물 경북 영양군 감천리 측백나무 숲 영양군 제공
천연기념물 경북 영양군 감천리 측백나무 숲 영양군 제공

◆포항 금광리 신생대 나무화석

측백나무는 측백나뭇과에 속하는 상록침엽수로 우리나라와 중국이 원산지다. 키가 25m까지 자라는 교목이지만 정원이나 묘지 앞에는 관목 같은 나지막한 어린 나무가 많다. 적갈색 가지는 큰 줄기에서 제멋대로 나와 하늘 향해 뻗었고, 회갈색의 나무껍질은 세로로 길게 갈라진다. 가지에 조롱조롱 달린 열매는 도깨비 뿔처럼 울퉁불퉁하다. 작고 납작한 송사리 비늘같이 생긴 푸른 조각이 포개진 잎은 여러 갈래의 작은 가지처럼 달린다.

조경수로 심어진 정원의 측백나무는 사철 변치 않는 푸른 잎이나 둥그스름하게 다듬어진 모습 말고는 눈에 띄는 특별한 매력이 없다. 화려한 도시나 한적한 농촌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한참 부족하다. 하지만 역사와 전설을 알고 나면 무심코 보지 못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측백나무는 300살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천년 이상을 사는 장수나무다.

측백나뭇과 식물이 한반도에서 살아온 시간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2009년 경북 포항시 동해면 금광리의 한 도로 공사 현장에서 무려 2천만 년 전 측백나뭇과로 추정되는 화석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측백나뭇과에는 측백나무, 편백, 삼나무, 향나무 등이 포함된다. '포항 금광리 신생대 나무화석'은 보존 상태가 좋고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로 등록했다. 수천만 년 전에 한반도에 살던 나무 화석으로 높이 10.2m, 폭 0.9~1.3m 크기다.

경북 안동시 구리 측백나무 숲 안동시 제공
경북 안동시 구리 측백나무 숲 안동시 제공

◆조선 초기 문신의 대구 측백수림 예찬

조선시대 세종에서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6명의 임금 아래서 활동한 문신 서거정이 읊은 「대구 십영」(大丘十詠) 중에서 제6영 「북벽향림」(北壁香林)은 대구 동구 도동 측백나무 숲의 기백과 맑은 향기를 예찬했다.

절벽의 푸른 삼나무는 기다란 옥삭 같은데(古壁蒼杉玉槊長·고벽창삼옥삭장)

거센 바람 끊임없어 사계절을 향기롭구나(長風不斷四時香·장풍부단사시향)

정성스레 다시 더욱 힘들여 가꿔 놓으면(慇懃更着栽培力·은근갱착재배력)

맑은 향기를 온 고장이 함께할 수 있으리(留得淸芬共一鄕·유득청분공일향)

도동 측백나무 숲이 언제부터 형성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불로천 옆의 가파른 바위산에 높이 5~7m의 측백나무 수백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측백나무 자생지이다.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돼 상징성이 크다.

경북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측백나무 군락이 2곳 있다.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의 구리 측백나무 자생지와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의 측백수림으로, 모두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안동 천연기념물 구리 측백나무 자생지는 대구와 안동을 잇는 옛 국도 옆 낙동강과 맞닿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수령은 대략 100∼200년으로 추정되며 약 300여 그루가 산다. 절벽에 뿌리 내린 탓에 생육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

영양의 천연기념물 측백나무 자생지는 영양읍내에서 가까운 반변천을 낀 절벽에 위치하고 있으며, 측백나무 높이는 3∼5m다.

경북 의성군 소우당 별서 정원의 측백나무
경북 의성군 소우당 별서 정원의 측백나무

◆경북 사대부 정원의 측백나무

경북 의성 지역의 대표적인 양반 사대부 가옥인 소우당 본채 서쪽에는 별도의 토담을 두른 넓은 공간에 별서 정원이 있다. 정원의 가운데에 별당이 있다. 디딤돌을 따라 가다 보면 연못과 소나무, 배롱나무, 대나무, 모과나무 등 다양한 나무로 꾸며진 숲이 펼쳐진다. 그중 압권은 아름드리 측백나무 두 그루다. 어른 팔로 감싸 안아도 두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굵으니 둘레가 2m는 넘을 듯하다.

경북 경주시 손곡동 종오정 연당 북쪽에 있는 측백나무 한 그루도 굵기가 아름드리다. 종오정은 조선 영조 때 학자 최치덕의 유적지다. 그의 신도비(神道碑) 병서(並書)에는 그를 '하분의 교(敎)와 왕부의 효(孝)를 겸한 고사(高士)'로 칭송한 글귀가 보인다.

중국 진(晉)나라 사람 왕부(王裒)의 효성과 관련된 나무가 측백나무다. 그의 아버지 왕의(王儀)가 사마소(司馬昭)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었다. 그는 비명에 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며 숨어서 제자들을 키웠다. 나라에서 그를 여러 차례 불렀으나 죽을 때까지 벼슬 자리에 나가지 않고 아버지 무덤을 지키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측백나무가 찌들어 죽었다고 한다.

종오정의 측백나무도 효심을 아는지 키가 크지 않고 우듬지 쪽이 뭉툭한 모양새다.

경북 경주시 종오정의 측백나무
경북 경주시 종오정의 측백나무

측백나무의 겉과 속이 늘 푸른 잎은 군자(君子)의 성품으로 여겼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세태와 비교돼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의 본보기가 된다. 바람이 불어도 잎과 잗다란 가지의 능청능청한 부드러움과 특유의 향 때문에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왔다.

우리 주변에서는 몇 가지 다른 종의 측백나무를 볼 수 있다. 설악산과 오대산 등 높은 산에서 가지가 수평으로 퍼지며 누운 듯이 자라※는 눈측백나무가 있다. 가지가 많이 갈라지는 천지백과 잎이 노란색을 띠는 황금측백나무는 관상용으로 인기가 많다.

미국에서 들여온 서양측백나무는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고 잎이 넓어 생울타리로 활용된다.

편백나무 잎의 숨구멍
편백나무 잎의 숨구멍
화백나무 잎의 숨구멍
화백나무 잎의 숨구멍

측백나무와 비슷한 무리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편백나무과 화백나무가 있다. 두 나무는 잎 뒷면의 하얗게 보이는 숨구멍(기공) 모양이 다른데 Y자 모양이면 편백이고, W자 혹은 흰 점처럼 생겼으면 화백이다.

◆소식의 필화 사건 '오대시안' 증언

중국 한나라 관리들의 비리와 문제점을 감찰하던, 우리나라 감사원 같은 기관이 어사대(御史臺)이다. 이곳에는 측백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백대(柏臺)라고도 했다. 조선시대 사헌부를 백부(柏府)라 부른 것도 이런 영향이다. 백대의 측백나무에 까마귀가 많이 모여 사는 까닭에 '오대'(烏臺)라는 별칭도 얻었다.

중국 북송의 문호 소식(蘇軾)의 필화(筆禍) 사건이 '오대시안'(烏臺詩案)이다. 부국강병의 개혁을 추구하던 신법(新法)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는 빌미로 신당으로부터 탄핵당한 소식이 조정을 비판한 죄로 붙잡혀 감금당한 곳이 바로 어사대다. 오대의 측백나무는 고초를 당하던 소식의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오대시안'은 어사대와 그 안의 측백나무, 그리고 당시 정치적 연관성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말이다.

측백나무 열매
측백나무 열매

한편 북송의 개혁에 맞서다 '적폐'로 몰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소식은 130일 투옥된 후 석방돼 황주단련부사(黃州團練副使)로 쫓겨났다. 유배지에서 그는 불후의 명작 「적벽부」(赤壁賦)를 비롯해 뛰어난 시문을 남겼고 자신의 호도 동파(東坡)거사라 지었다.

소식이 오대에서 고문에 시달리고 있을 때 구명운동을 벌인 사람 중에는 정치적 라이벌이자 한때 개혁을 주도한 왕안석도 들어 있다. 황제에게 버림받아 집과 가족을 잃고 고향에서 혼자 울분을 삼키고 있던 그는 '제 코가 석 자'인 처지임에도 소동파를 두둔하고 나섰다.

소동파도 훗날 철종을 대신해 지은 칙서에서 "왕안석은 하늘의 뜻을 받아 대업을 추진한 귀재"라고 치켜세우며 "글솜씨는 만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듯했으며, 용맹스러움이 천지를 뒤흔들었다"고 극찬했다.

소동파와 정치적 앙숙이었던 왕안석은 비록 정적이지만 서로 사지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이들이 후반에 이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고상하고 깨어 있는 도덕적 성품과 정치철학 덕분이었다.

왕안석은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수레를 이용하지 않았고, 첩을 들이지 않았고, 유산을 남기지 않은 재상이었다.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반대파를 숙청하긴 했지만 벼슬을 깎거나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정도였지 죄명을 날조하거나 함정에 빠뜨리거나 사지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중국 인문학자 이중톈(易中天)의 『제국의 슬픔』에 나오는 내용이다.

민생 문제 해결에는 손놓은 채 내로남불의 정치인들이 벌이는 사생결단식 소모적 정쟁이 판치는 요즘 정치와는 사뭇 달랐다.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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