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2017 ‘소희’와 2023 ‘다음 소희’

배성훈 경북본사장
배성훈 경북본사장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을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써. 그러면 완전히 혼자가 돼."

최근 영화 관객들 사이에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영화 '다음 소희'. 주인공인 현장실습생 소희는 답답한 현실에 긴 넋두리를 내뱉는다. 2시간 반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애써 화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휴~' 하는 긴 한숨을 뱉으면서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대기업 통신회사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던 고등학생이 3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열여덟 소희는 인격 모독이 가장 심한 '욕받이' 부서에 배치됐다. 인터넷, 휴대전화 계약 해지를 방어하면서 할당받은 고객 응대 횟수를 못 채우면 퇴근도 못 했다. 소희는 회사에서 시키는 일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사업장의 현실은 열여덟 어린 여고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씩씩했던 소희는 결국 학교와 기업, 교육 당국이 만든 부당한 관행과 시스템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현장실습생들은 직업교육훈련촉진법의 적용을 받는 교육생인 동시에,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 적용을 받는 노동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교육·노동 당국의 손길은 미치지 않았다. 소희가 겪어야 했던 가혹한 현실은 불행한 개인사가 아니라 다수의 '소희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끔찍한 진실이었다. 현장실습에 나선 학생들이 크게 다치거나 숨지는 사고는 소희가 죽기 전 10년 전부터 있었다. 2011년 광주 자동차 회사 현장실습생은 작업 도중 뇌출혈로 쓰러졌고, 2014년엔 충북 진천 식품회사 현장실습생이 동료 근로자들의 질책을 못 견뎌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같은 해 울산 자동차 협력업체에서는 지붕이 무너져 내리면서 깔려 숨지는 실습생도 있었다. 학교는 취업률을 올리기 위해, 기업은 이윤을 내기 위해 현장실습생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관리 감독 책임이 있는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는 그저 관망할 뿐이었다.

영화를 만든 정주리 감독은 인터뷰에서 열여덟 소희만의 비극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음 소희가 나올 수 있다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영화 제목을 '다음 소희'로 붙였다고 말했다. 감독은 영화 제작 중에도 또 다른 실습생들의 부고가 끊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 현장실습생이 사망했고, 2021년 여수 요트 선착장에서는 또 다른 안타까운 삶이 잠수작업을 하다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현장실습 협약서에는 항해 보조와 접객 서비스 담당으로 기록된 고교생이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제거하다 차디찬 바다에서 숨을 거둬 안타까움을 더했다. 사고 1년 후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솜방망이로 끝나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영화
영화 '다음 소희' 포스터.

소희의 죽음으로부터 6년이 지났다. 하지만 현장실습생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인권 개선 방안 마련 실태조사'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전자산업에서 현장실습생들이 3교대 노동에 시달리고 1급 발암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현장실습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업장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노동안전 관리 책임 강화와 현장실습 전반을 모니터링하는 시스템 구축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막을 수 있었잖아. 근데 왜 보고만 있었냐고."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안타까운 죽음이었던 2017년 소희가 우리에게 묻는다. 2023년 현재도 이 많은 '소희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음 소희'가 나올 수 있다고….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