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영한 후에도 다시 한 번 보고픈 그런 드라마가 있다.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앞에서 했던 어떤 말이나 장면들이 가진 의미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드라마. 종영한 JTBC '사랑의 이해'가 바로 그렇다.
◆멜로 넘어 사회성 짙은 작품
JTBC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종영했다. 하지만 종영한 후에도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보통의 드라마들이 종영과 함께 금세 기억에서 지워지는 경향이 있다면, 이 드라마는 그런 점에서 예외적이다. 끝났지만 여운이 길다. 못내 이뤄진 것도 또 이뤄지지 않은 것도 아닌 열린 결말. 그 결말 앞에서 시청자들은 마치 과거 한 때의 열병 같던 사랑을 떠올리듯, 이 드라마를 복기하고픈 욕망이 생겨난다. 그 때 그래서 저런 이야기를 했었구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처럼 보였는데 지나고 보니 이제 알겠다…. 이 드라마의 이런 여운은 왜 이리도 길게 남게 된 걸까.
'사랑의 이해'라는 멜로의 구도는 포스터 한 장에 들어 있는 하상수(유연석), 안수영(문가영), 박미경(금새록) 그리고 정종현(정가람)이라는 네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속에 다 담겨질 정도로 단순하다. 이른바 4각 멜로다.
하상수는 안수영을 좋아하지만, 안수영은 그 사랑을 도망치듯 피해 정종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를 집으로 들여 동거를 한다. 그리고 하상수와 안수영의 관계가 그렇게 슬쩍 거리가 생길 때 그 사이로 박미경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저 남녀 간의 감정에만 솔직했다면 이러한 복잡한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게다. 실제로는 하상수와 안수영이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상수가 "좋아한다"고 고백하자 안수영은 도망치듯 자신은 정종현과 만난다고 거짓말을 한다. 남녀 간의 사적 감정만으로 보면 안수영의 이런 말과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이 너무나 납득되게 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건 좋은 대학을 나와 은행에 정규 채용된 하상수와 고졸자로 창구직원인 안수영 사이에 현실적인 경계선이 그어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수영은 점내 최고 영업실적을 내도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직군 전환 시험'에 번번이 떨어진다. 또 늦게 들어온 하상수는 그의 밑에서 처음 은행일을 배우고 시작했지만 그보다 높은 직급이 됐다.
은행 직원들도 각종 허드렛일을 창구직원인 안수영이나 청경인 정종현에게 시키는 걸 당연시한다. 드라마 속에 등장한 건 아니지만 꽤 많은 남자 직원들이 안수영을 찝쩍거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하상수의 '작은 망설임' 하나에도 안수영은 '피해의식'과 '보호본능'이 작동했을 게다. 그러면서 '같은 과'로 여겨지는 정종현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을 테고, 그래서 도망치듯 그와 동거까지 하게 된다. 또 자신이 도망친 하상수에게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에게 노골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박미경이 자신보다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이처럼 '사랑의 이해'는 그 중의적인 제목처럼 이해관계로 대변되는 현실 속에서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엇나가고 요동치는가를 그려낸다. 단순한 4각 멜로의 구도지만 현실과 사랑의 팽팽한 대결구도(?)를 통해 이른바 스펙사회로 불리는 우리 사회의 일면을 담는 사회성 짙은 작품이 된 이유다.
◆관계 일그러뜨린 계급화된 삶
남녀 간의 엇갈린 사랑으로 그려낸 드라마지만, 그들의 사랑을 엇나가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계급화된 삶이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그저 멜로드라마라고 부르기 어렵다. 실제로 이 드라마를 평이한 멜로드라마의 관점으로 보면 인물들의 선택이 납득이 되지 않기도 하고 때론 고구마 몇 개를 먹은 듯한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즉 멜로드라마는 목적 자체가 남녀 간의 사랑이 이뤄지는 그 과정에 있지만, '사랑의 이해'는 멜로드라마의 그 틀을 차용해 이러한 사랑 같은 사적 감정조차 있는 그대로 허용하지 않는 계급화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목적인 드라마다.
이런 계급화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건, 하상수와 안수영이 결국 헤어져 각각 하상수는 박미경과 또 안수영은 정종현과 공식 커플이 되지만, '같은 과'라고 여겼던 그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선을 발견해가는 대목이다.
즉 하상수와 박미경은 대학 선후배 관계로 같은 부류처럼 보이지만 부모의 재력에서는 큰 차이가 난다. 박미경의 아버지는 은행 VVIP 고객으로 하상수와 은행장이 함께 골프 접대를 해야 하는 인물이고, 그의 어머니는 하상수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에스테틱의 단골 VIP 손님이다. 박미경은 자신이 좋아하는 하상수에게 선물로 차 한 대를 줄 수도 있는 인물이지만, 하상수는 그것이 너무나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대학 선후배로 또 은행 동료로는 불편함이 없던 관계지만, 가족까지 얽히는 연애 관계로 들어가자 집안 차이는 그들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은 안수영과 정종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같은 과라 여겼지만 정종현은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자 월세 보증금마저 빼주고 안수영의 집에 얹혀 살게 되는 처지가 된다. 게다가 경찰 공무원 시험에 자꾸 떨어지자 정종현은 안수영에게 "미안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된다.
서로 다른 계급의 선 속에서 하상수가 박미경에게 이질감에 불편해했다면, 안수영은 정종현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불편해진다. 그래서 결국 하상수와 박미경도 또 안수영과 정종현도 헤어지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상수와 안수영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멜로드라마'의 공식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시간이 흐른 후 좀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만나긴 하지만 여전히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을 맺는다. 그것이 멜로가 아닌 이 드라마가 그리려 한 계급화된 삶(그래서 사랑마저 쉽지 않는)을 가장 잘 표현하는 엔딩이기 때문이다.
◆'사이다' 드라마 천국 속 '고구마' 가치
'사랑의 이해'는 그래서 멜로드라마의 관점으로 보면 이른바 '고구마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무언가 관계가 이어질 듯 싶은 순간에, 안수영은 또 도망가고 하상수는 끝내 그를 잊지 못하다가 어느 날 다시 우연히 만나는 일이 반복된다. 저 정도로 우연이 반복된다면 그건 운명이 아닐까 싶지만, 드라마는 매정하게도 그건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최근 들어 드라마를 고구마냐 사이다냐로 양분해서 바라보는 시각이 생겼다. 당장 보고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효능감'이 그 드라마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단순한 권선징악과 해피엔딩만이 드라마가 해야 할 유일한 선택지처럼 여겨지는 추세다. 하지만 어디 우리네 삶이 그렇게 단순한 사이다로만 그려질 수 있을까. 오히려 퍽퍽한 고구마의 삶들이 우리의 현실을 보다 핍진하게 보여주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랑의 이해'는 이처럼 사이다의 그 톡 쏘는 맛에 중독된 드라마들 속에서 마치 디톡스라도 하듯 퍽퍽해도 제대로 할 말을 하는 고구마의 가치를 드러낸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물론 조금 답답할 수 있어도 그 안에서 애틋함이 느껴지고, 그래서 사랑이란 결국 저렇게 이뤄지기 쉽지 않아 갖게 되는 애틋함 그 자체가 아닐까 싶은 생각들을 드라마 엔딩에 이르러 갖게 된다.
이해관계의 현실 속에서 사랑은 저 몰아치는 파도 앞에 세워진 모래성처럼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 사랑은 더 아름답고, 애써 기억의 사진 속에 저장해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는 잔상으로 남겨 놓고 싶은 것이 아닐까. 종영한 드라마지만 그걸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되돌려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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