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누군가에겐 희미한 기억이 됐겠지만, 누군가에겐 뼛속 깊이 각인된 고통과 상처로 여전히 남아있다.
매년 그 날이 돌아올 때마다 가슴 한 켠 묵직한 응어리가 느껴지는 건 지역사회가 아직 그 날을 직시하고 잘못을 인정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과정을 마무리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20년이 되도록 '추모공원·추모탑'이라는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현실. 진정한 추모는 제대로 된 기억과 인정에서 출발한다. 두 차례에 걸쳐 지역 사회가 외면해 온 참사의 현재를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을 짚어본다.
◆가슴으로만 부여잡은 고통과 기억
전재영(62) 씨는 얼마 전 수명이 지난 벽시계를 거실에서 치웠다. 아내와 어린 딸이 끔찍한 참사로 전 씨 곁을 떠난 지 20년, 아내와 함께 샀던 물건들도 하나 둘 고장나기 시작했다.
아내와 함께 산 가전제품을 버릴 때마다 전 씨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해진다. 벽시계 아래에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 밥을 먹고, 청소하고 이야기하던 기억들도 함께 사라지는 듯 하다. 아직도 전 씨는 아내가 쓰던 화장품을 버리지 못했다.
아이와 아내는 그날 오전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가던 중 참변을 당했다. 들뜬 얼굴로 집을 나서던 딸은 그 길로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 소식이 끊긴 아내와 아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한동안 사진을 들고 목격자를 찾아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사고 후 한 달 뒤에야 아내와 아이의 유골이 발견됐다.
"딸 아이가 무릎에 앉아 재잘거릴때 느꼈던 아이의 무게감이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아요. 깔깔거리던 아이의 목소리도 서서히 기억에서 멀어지네요. 제삿날이 되면 혹시라도 영혼이라도 찾아왔을까 목소리라도 들릴까 말을 걸어봅니다."
전 씨의 소망은 오직 대구시가 약속한 추모사업이 제대로 진행되는 것 뿐이다. 그는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추모탑과 추모관을 만들고자 동분서주했다.
전 씨는 "팔공산 시민안전테마파크에 추모교육관, 추모탑, 묘역이 다 있는데, 그걸 '추모공원'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며 "사고를 이런 식으로 방치하고 곪은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면 비슷한 사고가 또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모(63) 씨는 20년 전부터 송홧가루가 날리는 5월과 낙엽이 지는 11월이 오면 발작적인 기침과 사투를 벌인다. 외출은 엄두도 못 내고, 대화도 힘겨울 정도다. 2003년 2월 18일 지옥같던 1호선 중앙로역 1080호 열차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후 생긴 후유증탓이다.
20년 전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하자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사람들의 비명이 고막을 때렸고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열기가 몰아쳤고, 유독가스를 들이마시는 순간 숨이 막혔어요. 출구도 몰라서 죽을 힘을 다해 길을 찾아야했죠."
간신히 죽음을 피했지만 삶은 완전히 헝클어졌다. 운영하던 학원은 접었고, 심한 기침 탓에 직장도 구하지 못했다. 피폐해진 몸은 곳곳에서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천식이 찾아왔고, 허리디스크 질환에 시달렸다.
온 힘을 다해 버텨낸 20년, 정 씨가 바라는 것도 딱 한가지다. 희생자와 부상자 간에 대립을 끝내고 끝 모를 아픔을 보듬어 줄 방안을 지금이라도 찾는 것이다.
정 씨는 "양측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겪은 아픔을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는 이들이 많다"며 "이들을 양지로 나와 함께 슬퍼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전히 외면받는 그 날…'추모' 명칭조차 사치
지난 2일 찾은 대구 동구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참사 희생자들이 이름을 올린 '안전상징조형물'과 화재가 난 전동차 1079호가 전시돼 있지만, 정작 이 곳이 추모 관련 시설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드물었다.
간간이 이어지는 방문객들의 발길과 관광객을 유도하는 '대구핫플 시안테'라는 현수막은 더욱 이 곳을 을씨년스럽게 했다.
자녀와 함께 방문한 정창모(39) 씨는 "여긴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곳으로 알고 있다"며 "안전상징조형물이 전적비인지 추모비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방문객 석수형(24) 씨도 "지하철 사고를 계기로 화재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체험하라고 만든 곳으로 안다"면서 "조형물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테마파크 프로그램 역시 추모보다는 재난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하철 참사 체험' 코너에는 최초 발화 전동차인 1079호 열차와 타버린 중앙로역 천장 타일을 볼 수 있지만 참사 당시 상황을 느끼긴 어려웠다.
같은 날 찾은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지하 2층 지하철참사 '기억공간'. 이용객들은 무심코 기억공간을 지나쳐 가거나 외벽만 슬쩍 훑어봤다. 1시간 30분동안 기억공간을 찾은 이는 8명이 전부였다.
방문객 정유경(37) 씨는 "기억공간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라며 "생각보다 규모가 작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건 다행"이라고 했다.
중앙로역 역무실 관계자는 "기억공간이 지하 2층에 있다 보니 찾기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다. 그래도 매년 2월 18일이 다가오면 이곳에 들러 꽃 한 송이를 놓고 가시는 시민들이 점점 많아진다"고 말했다.

◆단계별 추진 협약 '백지화'…대구시-정부 의지 보여야
참사 후 20년이 되도록 '추모'라는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배경에는 대구시와 유족, 상인들 간의 해묵은 갈등이 깔려있다.
오랜 시간 반목하던 대구시와 팔공산 동화시설지구 상가번영회(이하 동화지구 상가번영회)는 지난해 2월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 '추모사업'을 진행하고자 단계별 추진 협약을 맺었다.
협약은 ▷1단계 관광 트램 설치 시 '추모식' 허용 ▷2단계 '단풍 백리길' 조성 시 '안전상징조형물'을 '추모탑'으로 명칭 변경 ▷3단계 동화지구 도시재생사업 추진 시 '시민안전테마파크'와 '2·18 추모공원' 명칭 병기 등이 주된 내용이다.
지난 2021년 2·18안전문화재단이 조례개정 청원을 통해 추모공원 명칭 병기를 추진했으나 좌절된 상황에서 대구시와 상가번영회의 협약은 추모사업을 완료할 카드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 협약은 이미 백지화수순을 밟고 있다. 민선 8기 홍준표 대구시장이 당선되면서 대구시의 기류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구시 관계자는 "특정 요구 사항을 들어주면 추모를 허용한다는 식의 접근 자체가 맞지 않다"면서 "대안을 두고 검토하겠지만 기본적은 입장은 동화지구 개발사업과 추모사업이 별개라는 것"이라고 했다.
김남호 동화지구 상가번영회장은 "협약 내용 중에 진행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서 "상인들이 무작정 추모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추모사업이 지지부진한 배경에는 대구시의 이면합의 논란도 있다.
지난 2005년 대구시는 추모공원을 동화지구로 확정하면서 상인들에게는 테마파크는 추모공원이 아닌 시민안전교육관이라고 설명하고, 유족들에게는 결국 추모공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해 갈등을 초래했다.
오는 18일 2.18안전문화재단은 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 20주기 추모식을 열 예정이다. 이에 맞서 동화지구 상가번영회도 집회 신고를 제출한 상태여서 양측의 충돌이 우려된다.
유족과 동화지구측은 지난 2019년 갈등의 원인이 대구시에 있다며 화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구시가 추모사업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다시 마찰이 불거졌다.
특히 올해는 대구시와 동화지구 상가번영회의 협약 무산과 팔공산 국립공원화 추진 등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 상황이어서 추모식이 제대로 진행될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윤석기 희생자대책위원장은 "유족들이 상인, 주민들과 반목할 이유가 없다. 갈등을 부추기고 대립을 조장한 대구시가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대구시가 유족들에게 이면합의 사실을 인정, 사과하고 약속한 추모사업을 책임지고 완결지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대구시의 해결 의지와 함께 정부의 관심도 절실하다. 대구시는 보다 적극적으로 갈등 해결에 나서고, 추모 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특별법 제정 등 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대구지하철참사 추모식 당시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은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던 사고였기에 더욱 참아내기 힘든 아픔과 회한이 밀려온다. 다시는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한 예방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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