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튀르키예 강진이 발생했다. 독일계 미국 지진학자 리히터가 정한 기준 7.8의 강진이다. 피해지역은 진앙지 가지안테프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아브라함의 고향 산리우르파와 디야르바키르, 서쪽으로 대도시 아다나, 남쪽으로 신의 도시 안타키아와 시리아 알레포, 북쪽으로 신비의 역사 유적 넴루트 다이 넘어 말라티아까지.
미국 지질조사국은 이번 지진으로 무려 470km 단층파열이 생겼다고 발표했다. 피해지역이 대한민국의 영토보다 넓다. 국제 사회는 발 빠르게 구호 손길을 내밀었다. 혈맹 한국도 마찬가지다. 튀르키예는 고구려 연개소문이 중국 당나라에 맞서기 위해 제휴했던 민족이다.
6.25 때 1951년 용인 김량장 전투 승리주역은 튀르키예다. 튀르키예는 200여명의 희생자만 내며 중국군 1900여명을 살상해 승리를 일궜다. 한국 긴급구호대는 2월 8일 도착해 8명의 고귀한 생명을 구해냈다. 한국 구호대가 캠프를 차린 안타키아는 인류사를 아로새기는 주요 역사유적지다. 그 역사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한국 구조팀 캠프 안타키아... 알렉산더 전투 현장
안타키아로 가기 전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로 꼽히는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보자. 나폴리는 그리스인들이 B.C7세기 이후 진출하며 세운 새나라(Nea Polis)의 준말이다. 고인이 된 전설의 테너 파바로티 음성으로 듣는 '산타 루치아'항에서 걸어서도 갈수 있는 거리에 나폴리 국립박물관이 자리한다. 폼페이에서 걷어온 다양한 유물은 그리스 로마예술의 진수를 선보인다. 그중 전시관 2층을 빛내주는 예술품이 "이수스 전투" 모자이크다.
"이수스 전투" 모자이크는 세로 3.13m에 가로 길이는 5.82m. 무려 백 50만개의 미세한 테세라를 사용한 '마그눔 오푸스(magnum opus, 대작)'이다. 헬레니즘 시기 예술가들이 선호했던 흑(黑), 백(白), 적(赤), 황(黃)의 4가지 색의 테세라를 사용해 전체적으로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B.C 4세기말 화가 필록케노스의 그림을 B.C 2세기 에게해 고급 저택에 설치된 것을 정복자 로마인들이 걷어 폼페이로 옮겨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때 묻혔다가 발굴됐다. 생동감 넘치는 전투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알렉산더다.
B.C333년 11월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 군대를 궤멸시키는 장면이다. 이수스 전투로 페르시아는 사실상 몰락했고, 알렉산더의 그리스가 동지중해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패자로 올라섰다. 동서 문명의 운명을 가른 이수스 전투의 현장은 어디일까?

◆셀레우코스 장군 아버지 안티오쿠스 이름 딴 도시
안타키아를 찾은 것은 14년 전이다. 11월 말 안타키아는 우리네 10월 초의 청명하고 포근한 날씨였다. 시가지 동쪽에 우똑 솟은 해발 440m 하비브네카르 산 아래 시내 중심가를 시리아에서 흘러온 오론테스 강이 가로지른다. 알렉산더가 승리를 거둔 이수스 전투 현장은 안타키아에서 북으로 40여km 떨어진 이스켄데룬이다.
이스켄데룬과 알렉산더가 캠프를 차렸던 안타키아 일대를 '하타이' 지방이라고 한다. 터키 최남단으로 시리아와 접경지역이다.알렉산더가 죽은 뒤, 그의 부하 셀레우코스 장군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며 B.C300년 안티옥(Antioch)을 세운게 안타키아의 기원이다.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딴 효심의 도시였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로 크게 발전했다.
'마그누스(위대한 자)'란 호칭을 얻은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B.C 64년 안타키아를 함락시키면서 로마의 역사에 편입된 뒤에도 번영을 누렸다. 전성기 인구 50만명으로 오늘날 3만4천명보다 월등히 많았다. 향료 무역의 중계지로 번성하며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제국 3대 도시로 불렸다. 국내 각지에 '안디옥 교회'라는 개신교 교회를 많이 본다. 바로 이 안티옥을 가리키며, 현대지명 안타키아다.

◆안타키아 박물관 세계 양대 모자이크 박물관의 하나
안타키아 남쪽에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 번영한 다프네(현재, 하르비에)가 자리한다. 다프네는 그리스 신화 학예의 수호신 아폴론이 사랑하던 요정이다. 다프네 유적을 미국 프린스턴 대학팀이 1932년-1938년 집중 발굴했다. 다프네 유적지를 비롯해 안타키아 일대에서 발굴한 로마 모자이크들은 전 세계 20개 박물관으로 유출됐지만, 1939년 당시 보호국 프랑스가 지어준 안타키아 고고학 박물관에도 상당량 소장돼 있다.

2014년 시내 외곽에 새로 지은 하타이 고고학 박물관으로 이전해 오늘에 이른다. 튀니지 수도 튀니스의 바르도 박물관과 함께 세계 최고의 로마 모자이크 양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지진 다음 날 2월 7일 영국 BBC는 안타키아 내 1200개 건물이 붕괴됐다고 보도했다. 카오스에서 우주창조를 묘사한 "게와 카르포이", 트로이 전쟁을 다룬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를 비롯한 주옥같은 모자이크 문화유산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란다.

◆안타키아... 기독교도(Christian) 용어 발상지
안타키아는 기독교 포교 중심지로도 이름 높다. 대한성서공회가 펴낸 신약을 보면 사도행전 11장 19절부터 '안디옥 교회'를 다룬다. 여기 26절에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고 기록된다.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교도(Christian)라고 명명한 지역이 안타키아다. 전세계 기독교도들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비브네카르 산록 절벽의 베드로 교회는 4세기 혹은 5세기 만들어졌다. 기독교 초기 교회 원형이 일부 간직된 유서 깊은 교회로 이름 높다.
◆안타키아... 페르시아, 아랍 이슬람, 돌궐, 십자군 촉발지
로마제국 안타키아에서 울려 퍼진 기독교 복음은 곧 알라의 가르침으로 바뀐다. 3세기와 7세기초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두 차례 받은 적이 있지만, 일시적이었다. 637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아랍 이슬람의 공격은 달랐다. 637년 시리아 북부 이온 다리 전투에서 아랍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군을 물리치고 안타키아를 정복했다.
이 무렵 예루살렘도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332년 뒤, 969년 동로마 제국이 기독교 도시로 되돌렸다. 하지만, 100여 년 뒤, 전혀 다른 세력이 찾아왔다. 몽골 초원에 뿌리를 두고 중앙아시아, 이란을 거쳐 이슬람화된 과거 고구려의 동맹세력 돌궐족 셀주크 튀르키예가 1084년 안타키아를 접수했다.
안타키아 함락으로 성지 예루살렘 순례 육로길이 막히자 교황 우르바노스 2세는 십자군 운동을 제창했다. 십자군이 1098년 안타키아 공국을 세우면서 안타키아는 기독교 세력에 넘어갔다.

◆안타키아... 몽골제국의 속국이 되다
몽골 초원에서 또 다른 손님이 가공할 군사력으로 찾아왔다. 몽골 제국 4대 칸 몽케의 동생 훌라구가 3차 서방 원정의 명을 받고, 1258년 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이슬람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킨 데 이어 1259년 시리아 다마스커스도 함락시켰다. 이에 앞서 몽골군은 1236년 코카서스 산맥의 기독교 왕국 조지아를 정복했다.
조지아의 헤툼 1세는 몽골의 속국이 되자, 자신의 사위이던 안타키아 공국의 보헤몽 6세를 설득해 몽골에 항복하도록 했다. 신의 도시, 기독교 국가 안타키아 공국은 1260년 몽골 속국이 됐다. 하지만, 안타키아 공국은 몽골의 내부 갈등을 틈탄 돌궐의 한 갈래, 카스피해 연안 출신의 이집트 맘루크 왕조에 1268년 정복된다.
다시 이슬람에 편입된 거다. 이후 16세기 셀주크 튀르키예의 한 갈래 오스만 튀르키예에 정복돼 오늘에 이른다. 강진 희생자의 넋을 기리며 조속한 복구를 기원해 본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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