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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자신의 감정을 알고 표현할 줄 알아야 남의 감정도 공감하고 이해해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우리 집에도 소위 이대남(20대남자)이 있다. 이제 대학생이 된 아들은 생활 리듬이 나와 정반대다. 밤늦도록 컴퓨터 앞에 있다가 엄마가 출근할 시간이면 잠든다. 장래에 대한 계획은 있는지 열정은 있는지 의구심이 들 때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릴 때는 재롱도 잘 부리고 꿈 많은 아이였는데, 요즘은 자는 모습만 보이는 것 같다. 그렇게 귀엽고 엄마 껌딱지였던 아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달라졌는지 돌아보게 된다.

늦둥이로 얻은 아들은 심성이 곱고 행동도 단아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부끄럼도 많고 눈물도 많아서 중학교 때까지 울었다. 누나와 싸우다가도 울고 억울하면 말 대답 대신 눈물을 툭 터트렸다. 할머니는 손자가 눈물 많은 게 탐탁찮았고, 어른이 되어도 엄마와 살겠다고 하는 말을 하면 더 심사가 좋지 않은 듯했다.

할머니께서 손자에게 <너 커서도 엄마랑 살면, 네 색시가 싫어한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엄마, 엄마는 누나랑 살면 안되?"라고 하는 게 아닌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은 엄마가 가장 중요하지만, 미래의 여자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힘든 일이니, 작전을 급변경하는 아들의 순발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박하사탕처럼 달콤 쌉쌀한 기분이 들었다. 아들이 심리적 독립의 싹을 보여준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아들의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코로나 확산 초기에 대구 시민들은 모두가 참 힘들었다. 병원에 확진자가 다녀가면 방역을 하고 병원 문을 닫았다.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쉬어도 편하지 않았다. 아들은 고등학교 교문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등교가 전면 금지되었고 온라인 수업이 장기화되면서, 밤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학교도 못가고 집안에만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초고속 인터넷을 깔아주고 최고급 컴퓨터도 사주었다. 온라인 수업한다고 컴퓨터 앞에서 앉아있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가슴을 뛰게 하는 학창시절을 겪지 못한 아들이 대인관계나 잘 할 수 있을지, 복잡한 사회로 나아가 적응이나 할 수 있을지 항상 걱정스러웠다. 이제 20대 성인이 된 아들은 나의 우려대로 잠만 자고 컴퓨터 자판 소리만 들려주고 있다.

청소년기는 부모로부터 심리적 독립을 시작하고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취감도 맛보고 친구와 어울리면서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능력도 키워나가는 시기다. 자아 정체성 확립이 너무 빨리 되면, 앞으로 발전해나갈 영역이 막혀버릴 수 있다.

예를 들면, 너무 정치적 자극이나 이념에 노출되거나 종교적 신념에 몰입해버리는 경우, 정체성이 조기 마감(identity foreclosure)되어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성장해나갈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반대로 정체성을 수립하지 못하면, 정체성 확산(identity diffusion)을 초래하여 의욕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되어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한다.

요즘 이십대 남자들을 보면 정체성 형성의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성차별이나 성혐오 등의 유튜브나 매체에 몰입하면서 불만을 토로하거나 극단적인 정치적 견해를 주장하면서 분노 표출을 하면서 시간을 다 보내는 경우다. 반대로 아무 것도 해낼 자신이 없다거나 미래에 희망이 없다는 등의 무기력감과 무망감을 보이는 경우다.

이들은 힘들어도 상담을 받거나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실제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20대중에 여성이 두배 이상 많다. 남자들은 감정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억누르는 법 밖에 모른다.

댄 킨들론의 저서 <아들 심리학> 중에 나오는 글이다. <나는 희망한다. 내 아들이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분노와 방어라는 방패 뒤에 감추지 않기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믿기를. 정서적으로 풍만해 다른 사람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고, 표현이 풍부하고, 이해심 있고, 자기 삶을 건강하게 책임질 줄 알기를. 소년의 정서적 삶을 빼앗기지 않고 소년다운 열정을 간직하기를.>

자신의 감정을 알고 표현할 줄 알아야 남의 감정도 공감하고 이해할 줄 알게 된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는 사회 통념은 남자들의 감정표현을 억압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내면적 고통이나 갈등을 표현하지 못하고, 반항 행동이나 분노 표출, 자해, 폭력, 혹은 침묵으로 변질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씩씩한 모습 뒤에 감춰진 불안과 두려움은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면서 상처는 점점 더 커져간다.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오해가 더 자주 쌓이고 실망도 하기 쉽다. 서로에 대한 정서적 욕구를 읽어주지 못해서 관계가 불편해진다. 베이스 캠프이자 안식처가 되어야 할 가정이 불편해진 젊은이들은 자신을 알아주고 안식을 주는 곳으로 떠나버린다. 남자를 무거운 물건이나 들고 무딘 감정의 소유자로 몰고가지 않아야 한다. 남자도 아프면 울어도 되고 무서우면 뒤에 숨어도 된다.

어린 시절 자기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살아온 남자 환자가 있었다. 60대 남자분이 숨 쉬는 게 답답하다고 정신과를 내원하였다. 퇴근길에 차가 밀리면 질식해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감으로 차를 버려두고 응급실로 갔다. 심장이나 폐에 심각한 병이 생기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검사를 했지만 아무 이상 소견이 없었다. 소위 성공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으나 그는 밀폐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밀폐공포증은 어렸을 때 크게 놀랐거나,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힘든 일들을 겪었을 때, 기억과 연관된 곳에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어릴 때 부모님께 떼써본 적이 없고 힘들다고 말해본 적이 없이, 강한 척했고 부끄럽지 않은 척 하고 상처받지 않은 척하면서 살아온 긴 세월의 상흔이 밀폐공포증으로 솟아올랐다.

다면적인성검사 결과 그는 남성성보다 여성성이 강하고 경쟁보다는 평화를 더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그는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벗어나 어린 시절 동네 산길을 호젓이 걷고 싶다고 했다.

정신과적 문제는 긴 세월을 걸쳐서 형성된다. 현재 지금 나의 정신 건강 상태는 30년후 모습에까지 영향을 준다. 올빼미가 된 우리 아들이 어떤 고민이 있는지 내일 아침에는 물어보아야겠다. 혹시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는 엄마에게 커피 한잔 내려주는 건 아닐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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