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가사키 원자폭탄을 맞은 제 친구는 아직도 일본정부에게서 매달 지원금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날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는 이유 만으로 처절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지난 11일 2·18부상자대책위원회에 참석한 전용남(85) 씨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날 마신 유독가스 탓에 목에서 쇳소리가 났지만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그는 화재 당시 전동차 안에서 방화범 김대한을 제지하려 애썼던 이들 중 한 명이다.
참사 후 20년, 부상자들은 여전히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사고 경험에 따른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회와 격리된 이들도 적지 않다. 장기간 심리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고, 의료 지원도 제공되지만 실제 효과는 미미하다.
◆뒤늦은 의료 지원…지원 신청자도 미미
대구시는 사고 후 16년이 지난 2019년 10월 '대구 지하철화재 사고 부상자 의료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후유증을 겪고 있는 부상자들에게 구체적인 지원 근거를 마련한다는 게 이유였다. 지원 대상에 오른 이는 전체 부상자 151명 중 136명. 이후 3년 동안 6명이 세상을 떠나고 130명이 남았다.
시가 부상 사례별로 접근하고자 지난해 하반기에 실시한 '지하철참사 부상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대부분은 호흡기와 정신질환 피해를 호소했다.
그러나 의료 지원이 시작된 후 4년 동안 부상자 의료비는 편성한 예산 중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시행 첫 해인 2019년에는 전체 예산의 4%만 의료비로 집행됐고 이후로도 의료비 이용자는 50여명에 그쳤다.
부상자 현태남(80) 씨는 "사고가 2003년에 났는데 갑자기 2019년에 와서 의료비를 지원해준다고 하니 이용률이 적을 수 밖에 없다"면서 "2018년에 받은 뇌졸중 수술도 후유증이라고 생각하지만 의료비 지원은 전혀 못 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대구시 관계자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연락조차 닿지 않는 분들이 많다"며 "현 상황을 파악해야 구체적인 지원이 가능한데 현황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의료 지원 가운데 심리치료 이용률은 더욱 저조하다. 시에 따르면 조례 개정 후 심리치료비를 청구한 부상자는 4년 동안 16명에 불과했다.
대한적십자사가 운영하는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도 연간 최대 40만원까지 심리상담비를 지원하지만 이용자는 2020년 9명, 2021년 2명 등 11명에 그쳤다.
실질적인 효과는 미미한 상황이지만 부상자에 대한 의료비 지원 사업은 올해로 끝난다. 향후 일정 역시 여전히 불확실하다. 조례 상에 심의위원회 판단에 따라 최대 5년까지 사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조항이 유일한 희망이다.
시는 실태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올해 심의위원회를 열고 연장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부상자 치유 위해 포기 않는 적극적 지원 절실
의료 지원에도 불구하고 부상자들의 치료 순응도 역시 낮은 편이다. 치료 적기를 놓치면서 회복 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이 큰 데다 '참사 부상자'라는 낙인 효과에 대한 거부감도 크기 때문이다.
부상자에 대해 백안시하거나 지나친 관심도 이들이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로 꼽힌다.
부상자 김매자(71) 씨는 "사고 당시 대구시의 권유로 몇 차례 심리 치료를 받았지만 전문적인 상담이라 느끼지 못했고 차도도 없었다"면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나 심리상담을 받는다고 하면 좋지 않게 보는 시선도 의식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사고 당시 인명구조반장으로 활약하다 부상당한 60대 전직 소방관은 "당시 트라우마로 한동안 정상적인 근무가 불가능해 생계에도 큰 지장이 있었다"면서 "퇴직한 이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상담을 받고 정신적 외상을 치료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들이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심리 치료가 이뤄진다면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부상자 개인의 심리 치료만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도 함께 지원하는 등 전방위적인 치료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10년 동안 대한적십자사 재난심리지원센터 전문봉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부상자들을 만나온 김경희 대구공업대 스포츠심리전공 교수는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은 대부분 완치가 불가능해 가족 해체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고가 난 지 20년이 넘었지만 부상자들을 위한 명확한 매뉴얼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2·18안전문화재단 조차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고 대구시도 부상자 심리치료에 대해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지자체가 실질적인 치료로 이어질 수 있도록 복지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고 당시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백서 등을 집필했던 이성환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는 "사고 당시에는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깊게 신경을 못 썼고 이후에는 부상자들이 정신과나 심리상담센터 등에 방문 자체를 꺼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금은 부상자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소통한 가족들에게도 심리치료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운선 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지금 여전히 고통 속에 사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연대'의 자리"라며 "사회적인 참사가 최근까지도 계속되는 만큼 모두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역 사회와 시민들이 상담기관과 부상자를 연결하는 중간자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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