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용삼의 근대사] 뒤늦게 알려진 통감부 시절 근대 개혁

뇌물이 재판 좌지우지 충격, 3심제 도입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합병 아닌 협동자치 구상
日차관 도입해 식량 증산·도로 개축·배수 공사 주력

서울 남산에 들어선 통감부 청사.
서울 남산에 들어선 통감부 청사.

통감부는 1906년 2월 1일부터 1910년 9월 30일까지 4년 7개월간 존속되었다. 하지만, 통감부 시대에 일본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덕분에 통감부 시대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주권 찬탈을 향한 준비 기간이었다는 선입견만 남긴 채 암흑 상태로 방치됐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 결과 통감부 시절, 대한제국에서 근대적 제도 개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제국의 합병을 반대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 자치를 허용하는 일종의 한일 협동자치를 구상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려졌다(방광석, 「메이지 정부의 한국 지배정책과 이토 히로부미」, 이성환·이토 유키오 편저,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 선인, 2010, 52~73쪽).

이토는 을사보호조약에 따른 일본의 의무와 책임을 첫째, 한국 국토의 방위, 둘째, 한국 외교의 관리, 셋째, 한국 황실의 안녕 보증, 넷째, 한국의 시정개선(이영미 지음·김혜정 옮김, 『한국 사법제도와 우메 겐지로』, 일조각, 2011, 26~27쪽)으로 정의했다. 일본의 보호 아래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로 개혁하여 독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었다.

중세 봉건상태였던 대한제국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은 완전 바닥 상태여서 개혁 자금을 국고에서 동원하는 것이 불가능하자 이토 통감은 일본흥업은행에서 무담보로 1천만 원의 차관을 도입했다. 이 차관이 1907년 대구 지역 애국지사들 중심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원인 제공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통감부는 문제의 차관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우선 식량 증산, 도로 개축, 배수·관개·산림녹화 등 이 땅의 농민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돌아가는 분야에 긴급 투입했다. 이어 큰 마을에 소학교(보통학교)를 설립했고, 1906년 4월 탁지부에 수도국을 신설하여 서울에 수도 가설공사를 시작했다. 1908년 1월 인천·부산·평양에 수도 시설을 위한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그해 9월 서울 수도공사가 준공되어 가정에 상수도 공급이 시작되었다.

1907년 6월에는 서울-인천, 서울-개성, 서울-평양 간 시외전화가 개통되었고, 전기 공급 시스템이 건설되었다. 1910년 1월 통계에 이하면 서울에 전등 가설을 신청한 가구가 1,200호였다. 서울 가구의 4%가 전기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여러 제도 중 가장 문제가 심각한 분야는 사법제도였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중세 봉건적 사법제도에 대해 "공정해야 할 재판이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옳고 그름이 가려지고 권세의 유무에 따라 잘잘못이 결정된다. 심한 경우 무고한 백성 잡아다 재산을 착취하거나, 유죄를 구형받은 죄수를 풀어주고 금품을 강요하는 등 추잡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상태"라고 비판했다.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가 사법 개혁을 위해 초빙해 온 법률 전문가 우메 겐지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법 개혁을 위해 초빙해 온 법률 전문가 우메 겐지로.

이토 통감은 1906년 3월 21일 시정개선협의회에서 감옥 개량, 특히 남녀 죄수를 분리 수감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때까지 남녀 죄수를 한 방에 수감했다는 뜻이다.
국제법 전문가인 이토 통감은 대한제국이 국제무대에서 근대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외국인의 치외법권 철폐가 급선무이며, 그에 따른 전제조건인 민법과 상법의 제정, 사법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후진적인 분야가 재판 사무인데, 현 상태로는 도저히 전망이 없으니 일본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일본 도쿄대 교수이자 일본 민법의 기초자인 우메 겐지로(梅謙次郎)를 초빙해 왔다.

우메 겐지로는 재판을 담당하는 대한제국의 지방관들이 법률 지식이 없으니 공정한 재판을 위해 일본 법조인을 법무 보좌관으로 파견하여 재판을 돕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따라 일본의 현직 판·검사 27명이 대한제국 법무 보좌관으로 초빙되었다. 현지에 도착한 이들이 목격한 대한제국의 감옥은 목에 칼을 쓰고 발목에 차꼬를 차고 생살이 썩어 죽어 나가는 지옥이었다. 감옥 내부의 불결함과 난잡함, 죄수 처우의 참혹함은 온몸에 소름 돋을 정도였다. 또 재판이 뇌물에 의해 유죄·무죄가 결정되는 모습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우메 겐지로는 새로운 '재판소 구성법'을 통해 근대적 재판제도인 3심제를 도입했고, 공정한 재판이 시행되도록 노력했다. 1909년 8월 통감부 정황 보고 중 "신재판소에 대한 한국 인민의 감상은 매우 양호해서 정직과 공평함을 신뢰하고 있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라는 내용이 발견된다. 1909년 12월 인천경찰서장의 기밀 월보(月報)는 "한국에 대한 제국(일본) 정부의 시정 중 재판제도는 가장 성공한 개혁 중의 하나"라고 보고했다.

대한제국 사절의 감옥. 법무 보좌관으로 파견된 일본 판·검사들은 감옥 내부의 불결함과 난잡함, 죄수 처우의 참혹함은 온몸에 소름 돋을 정도였다고 보고했다.
대한제국 사절의 감옥. 법무 보좌관으로 파견된 일본 판·검사들은 감옥 내부의 불결함과 난잡함, 죄수 처우의 참혹함은 온몸에 소름 돋을 정도였다고 보고했다.

일부 학자들은 한일병합 과정에서 백성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인에 의한 공정한 재판제도 시행 덕분이라고 지적한다.
이어 조세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징세는 지방 수령(군수) 아래 적게는 20~30명, 많은 지역은 50~60명의 아전이 세습 형태로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생산량이 많은 토지를 과세대장에서 누락시키거나, 과세 대상에 등재된 농지의 경작면적을 축소하여 세금을 착복했다.

통감부는 1906년 10월 수령·아전의 징세권을 박탈하고 지방에 세무감을 두어 중앙정부가 세금을 직접 징수하는 방식으로 개혁했다. 세금은 일본 통신관리국 소관의 우편국에 납부토록 제도를 변경했다. 그 결과 1905년 216만 원에 불과했던 지세(地税) 수입이 1910년에는 600만 원으로 세 배가량 급증했다. 그 동안 국고의 3분의 2가 탐관오리 수중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통감부의 개혁은 힘없는 백성에겐 축복이었으나 그들을 착취하던 기득권층에겐 재앙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낸 세금을 일본으로 빼돌린다며 배일 감정을 선동했고, 고종은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여 저항하다가 폐위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이 보도되자 일본의 국수주의자들과 군부는 이토 통감의 자치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병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토는 통감에서 해임 당했고, 1909년 7월 6일 일본 각의는 '한국병합에 관한 건'을 승인하고, "적당한 시기에 병합"을 결정했다. 통감에서 물러난 이토는 1909년 10월 27일 하얼빈 방문 중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했고, 그로부터 10개월 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합병당해 식민지로 전락했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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