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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9>매화를 사랑한 남자 매정 김용준

미술사 연구자

김용준(1904-1967),
김용준(1904-1967), '묵매', 1941년(38세), 종이에 수묵, 14×42.5㎝, 개인 소장

'근원수필'의 명문으로 유명한 김용준은 화가, 수필가, 미술사학자다. 을사늑약 한 해 전에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광복을 맞았을 때가 42세의 나이였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서울대를 거쳐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다 6·25 전쟁 때 북쪽으로 갔고 북한에서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김용준은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21세 때인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로 입상하며 재능을 일찍이 알렸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할 때 국내 신문에 '화단 개조', '무산계급 회화론' 등을 연재하며 이론가로도 활약한다.

논쟁적 미술이론을 발표하고 도쿄와 서울, 고향인 대구에서 서양화 그룹을 조직하며 앞서 나가던 김용준은 36세 때인 1939년 동양화로 화가의 길을 바꾸고 이론 또한 한국미술사 연구로 전환한다. 잘 나가던 서양화가인 그가 한 때 '모멸감을 갖고' 대하던 동양화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자기 나라 미술에 대한 인식과 존중은커녕 기본적인 지식조차 차단됐던 식민지교육을 받고 식민 본국인 일본에 유학한 그였다.

김용준 스스로 '내가 지나온 청춘 시절의 굉장한 역사'라고 할 만큼 쉽지 않은 길 바꿈이었다. '묵매' 제화는 "신사(辛巳) 유월(榴月) 방(仿) 완원선생(阮元先生) 필의(筆意) 매정(梅丁)"이다. 동갑 친구인 상허 이태준의 수필 '모방'에 '완당이라면 표구소까지 뒤지고 다니는' 김용준을 따라 완당 글씨 구경 갔던 이야기가 나온다. 김정희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더 연구하기 위해 어디든 찾아갔다고 한 이태준의 말대로 김용준은 김정희 작품을 많이 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완당의 스승인 청나라 완원의 매화그림을 보았고 이를 원본으로 삼았다고 밝혀놓았다.

매화는 새로운 문물을 앞세운 구화(歐化)주의의 대세를 거스르며 동양화가의 길을 선택해 외로울 수밖에 없던 김용준이 절절히 의지한 대상이다. '근원수필'의 첫 번째 글 '매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

김용준의 '묵매'를 보면 그의 수필이 떠오르고, '매화'를 읽으면 그의 매화그림이 연상된다. 매화를 한사(寒士)로 부르며 의지했던 매화의 오랜 상징과 매화그림의 역사에 대한 미술사학자로서의 인식이 없었다면 김용준의 매화그림과 매화에 대한 글은 깊은 울림을 주는 온전한 의미망을 구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용준은 우리 미술을 사랑하고 연구한 미술사학자로서의 심미안과 통찰력을 수필가로서 설득력 넘치는 글로 전달했고 화가로서 그림으로 그렸다. '묵매'는 김용준의 화가이자 수필가이며, 미술사학자라는 다재(多才)함의 융합이다.

매화를 사랑해 지은 호 매정(梅丁)으로 서명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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