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를 꼽으라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빠질 수 없다.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 천재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지금까지도 그를 모티브로 한 영화 '아마데우스', 뮤지컬 '모차르트'와 같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세계적인 클래식 작곡가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작곡가임이 분명하다.
그럼 그렇게 위대한 작곡가의 부인은 과연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그의 부인인 콘스탄체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악처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가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바가지를 긁고 매일 같이 목욕만 다니며 사치가 심했다는 등의 얘기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후세 음악사 학자들은 콘스탄체가 악처로 오해를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내 콘스탄체와의 인연은 모차르트가 일터를 옮겨 다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차르트는 원래 콘스탄체의 언니인 알로이지아와 연인 사이였지만 알로이지아의 아버지는 평범한 집안의 음악가인 모차르트 말고 부유한 명문 귀족 집에게 시집 가길 원했다. 그래서 둘은 헤어지고 모차르트는 파리로 갔다.
일 년이 지나고 둘은 빈에서 재회하게 됐는데 알로이지아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돼있었고 모차르트는 그녀의 동생 콘스탄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이 음악생활에 집중하길 바랐고, 콘스탄체의 무능함과 사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우려대로 결혼 이후 모차르트는 지속적인 아버지와의 갈등, 반대한 결혼 강행, 경제적으로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 살림을 전혀 모르고 매일 목욕만 다니는 아내, 계속 빚에 쪼들리는 생활 등 매일 고통 속에서 살며 작곡했다. 물론 이와 같은 생활이 콘스탄체에게도 힘겨웠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사이에는 4남2녀를 뒀는데 4명의 자녀는 어릴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체는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거동도 불편했고 몸이 허약해져 집에 박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아내를 그는 살뜰히 보살펴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꽤 젊은 나이인 35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 35세의 젊은 미망인 콘스탄체는 운명적으로 덴마크 외교관 겸 작가였던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쎈을 만나 재혼하게 된다. 콘스탄체는 전 남편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잊으려 재혼했지만, 폰 니쎈은 콘스탄체의 전 남편 모차르트의 진가를 세상에 알리는 걸 희한하리 만큼 필생의 사명으로 여겼다.
외교관 은퇴 뒤 아내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이주한 그는 모차르트 전기 집필에 매진했고, 그의 사후 첫 전기를 출간했다. 이쯤 되면 니쎈은 모차르트에 대한 진정한 팬심이 모차르트가 사랑한 콘스탄체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그의 노력을 통해 모차르트는 비로소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니쎈은 아내에게 아내의 전 남편이 얼마나 위대한지 가르쳐줬다.
모차르트가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알려진 건 하늘이 니쎈과 콘스탄체를 만나게 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악처라고 소문난 콘스탄체는 니쎈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위대한 예술가의 위대한 아내가 됐다.
우리는 가끔 최고의 예술을 접할 때 그 예술이 쉽게 나에게 전달된다고 착각하지만 예술 작품의 가치가 세상에 인정받기까지는 학자, 해설가, 열광적인 애호가, 지식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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