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90세 아들의 못다 푼 恨

조해정 영남대 대구경북학연구소 연구원

조해정 영남대 대구경북학연구소 연구원
조해정 영남대 대구경북학연구소 연구원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훌쩍 지났다. 학창 시절 이후 나에게 3·1절은 그다지 큰 의미 있는 날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지 않았던 후손들이 가지는 느슨함일 것이다. 얼마 전 그 느슨함이 팽팽하게 당겨진 일이 있었다. 우연히 달서구의 곽훈섭(90) 옹의 사연을 들은 것이었다.

곽 옹의 고향은 대구 달성군 유가면이다. 선친은 1901년생 곽동영(郭東英) 선생이다. 곽동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수형(受刑) 사실이 확인되나 월북했다는 이유 등으로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않았다. 곽 옹은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은 선친께서 일제강점기 때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독립운동이 정부로부터 인정받는 것뿐"이라며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독립유공자 포상과 관련하여 재심 청구도 여러 차례 진행했다고 한다. 이어 "선친은 독립 자금을 마련해 가며 항일 투쟁에 헌신하셨고, 광복 후에는 민족의 화합과 평화통일을 위해 쫓아다니시다가 타향에서 처자식도 못 보고 타계하신, 그런 불운의 우국지사라…" 선친 묘비에 쌓인 이끼가 가득한데 아직 한을 풀어드리지 못해 자식으로서 애통하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곽동영은 서울의 중앙학원(현 중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만세운동에 동참했다. 만세운동 후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대구지부에 가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1928년 'ㄱ당'에 참여해 보다 효과적인 독립 투쟁 방식에 참여하게 된다. 'ㄱ당'은 신간회의 대구지회 간부인 노차용(盧且用), 장택원(張澤遠), 정대봉(鄭大鳳), 이상화(李相和·시인), 문상직(文相直) 등이 1928년 4월 대구에서 구성한 독립운동 단체다. 단체의 목적은 전도유망한 청년들을 모집해 광둥군관학교(廣東軍官學校)에 유학시키고, 만주 방면의 미개간지를 개척함으로써 실력을 양성해 조선 혁명 독립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물론 독립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단체 설립 얼마 뒤인 1928년 6월 11일 노차용과 곽동영 등은 지역의 부호 김교식(金敎式)의 집에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던 중 일경에 검거됐다. 당시 곽동영의 부친은 아들을 구명하고자 재화를 다 소진하였고, 퇴락한 유가로 고장에 소문났다. 얼마 후 풀려난 곽동영은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됐고, 감시를 피해 은밀히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몸담았다가 6·25전쟁 때 서울에서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을 만나 월북했다. 가족들은 월북 전의 행적과 월북 후 적극적으로 북한 정권에 가담한 기록이 없다는 것 등을 근거로 납북된 것으로 알고 있다.

수년 전 영화 '암살'이 인기를 끌면서 영화 속 실제 인물인 약산 김원봉을 재조명하는 한편, 월북 독립운동가도 독립유공자로 추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한 의견에 대해 당시 국가보훈처는 '평생을 조국 독립에 헌신한 분들에 대한 민족적 예우라는 측면에서 일리가 있지만,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북한 정권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의 서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만 월북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로서는 아쉬운 일이고 한 맺힌 일이다. 하루속히 한반도에서 이념의 장막이 걷히고, 과거의 잣대로 소외됐던 독립투사들이 재평가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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