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 서사란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방법이다. 한마디로 줄거리를 말한다.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문학의 장르에서 이야기를 담는 것은 쉽지만 음악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발라드(ballade)는 음악에 의한 이야기를 뜻한다. 클래식 음악에서 대표적인 발라드는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마왕(Erlkönig)'이다. 슈만의 '두 사람의 척탄병'도 성악곡이지만 발라드에 해당한다. 기악의 발라드는 구성이 체계적이고 더 깊은 서사와 감정을 담는다. 쇼팽의 발라드 4곡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랍소디(Rhapsody)는 민족성이 짙게 혼합된 서사를 들려준다. 리스트의 '헝가리안 랍소디' 18개 곡은 피아노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기교로 관객을 숨 막히는 경지로 몰아붙인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바위고개 피는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 즐겨 꺾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문학적 기억과 음악적 기억은 다르지 않다. 서사는 음악적 기술(記述)에 해당하며 서정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는다. 이흥렬의 '바위고개'(1932)는 역사적 기억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곡의 서사는 일제강점기 서민의 고달픈 삶과 민족의 비극을 서정적으로 들려주며 온갖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6/8박자, 2도막 형식의 단순하고 느린 선율 위에 이별한 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각박한 시대를 노래한다.
'바위고개'는 개인의 비극과 민족의 비극을 동시에 불러온다. 약자의 설움과 약소국의 비애를 다루며 음악이 사회변천과 역사에 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노래는 격정적이지 않고 잔잔하며 감성적이다. 그래서 쓰라린 상처와 비애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게 한다.
1970년대 지구레코드사에서 나온 '한국의 가곡' 시리즈가 있었다. 그 당시에도 전축을 장만해 놓고 사는 집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사치로 생각하던 아버지는 가죽옷을 입힌 중형의 일제 트랜지스터 카세트플레이어를 마련해 마루에 놓고 '한국의 가곡'을 자주 들었다. 어느 초여름 나절 마루에서 '바우고개'와 '봉선화', '꽃구름 속에'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듣고 있던 내게 "노래가 시대를 담는다. 그 시절에는 그런 일이 흔히 있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바우고개'를 부르던 성악가는 화려하지 않지만 꽉 차고 안정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며 지구레코드사 홈페이지 곳곳을 찾아보니 다름 아닌 알토 윤을병 선생의 목소리다. 이 외에도 성음사에서 발매한 베르디와 바그너 오페라의 서곡과 합창을 이 기기로 들었다.
원로 성악가 윤을병의 목소리로 '바우고개'를 다시 듣는다. 음악은 지나간 시공간을 소환하는 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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