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릇하게 돋아난 감자 싹을 잘라 창가에 뒀다. 이깟 독어린 잎사귀가 무어라고 이리도 연연하는지. 내 고단함을 당신이 먼저 보고 있었던가.
"지금 우리 집 행운목은 온통 꽃망울. 100년에 한 번 핀다죠."
대학병원에서 수십 년간 환자들 마음을 치유하며 살아왔던 그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휴식에 든 당신을 위한 환대의 꽃일 거라고 답을 했다. 그 꽃이 뭐라고 외려 나를 위로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일정에 없던 특강과 월간지에 실을 인터뷰, 원고 마감에 쫓겨 머리는 뜨거운 김을 뿜어댔다. 눈을 뜨는 일은 늘 안갯속이었고 입술은 부르트기 일쑤였다. 여북하면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망망대해를 보러 갔을까. 달빛에 기대 두어 시간을 보내다 자정 무렵에 돌아오기도 해봤지만 잠시뿐.
밑져야 본전 아닌가. 생떼 쓰듯 나를 초대하라고 통보했다. 꽃이 절정이라는 날 드디어 행운을 훔칠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사거리 전광판에 '미세먼지 없음' 이라 적힌 글귀에 푸른 잎사귀가 넌출거린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치맛자락에 걸렸다. 평소 같으면 피멍이라도 들었을 테지만 이토록 멀쩡할 수 있다니. 단골집에서 점심 메뉴로 먹은 낙지. 여태 본적 없던 크기에 놀랄 수밖에. 슬슬 길운의 서막이 시작된 건가.
이제 행운을 만날 시간.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꽃향이 감돈다. 천장에 닿을 듯한 고목이다. 부러 안았다. 묘한 기분이 든다. 흰 꽃이 게워 내는 향을 훔치며 나눈 대화는 향긋지면서도 서프라이즈였다. 우리나라 대학생 절반은 현금 10억원과 감옥 생활 1년은 맞바꿀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데는 누구의 책임일까. 참 '웃프다'는 말을 실감한다.
흔히 셋만 모여도 주제가 되는 '1억 행운 챌린지'를 잇는다. 세계여행, 명품가방, 주식투자와 아무리 생각해도 하고 싶은 게 없다는 사람. 이 다양한 대답에 옳고 그름이나 지혜와 우둔함을 대입시킬 수는 없다. 이미 '행운'의 정의는 내려져 있으니 얽어 꿰차며 각자도생으로 살아가는 것도 한 방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제법 진지하게 고민이라는 걸 해봤다. 1억원이 생기면 뭘 하지. 마당 넓은 집으로 가자니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자니 부엉이 곳간으로 채울 리 만무하고. 은행에 묻어 두자니 마네킹을 보는 듯 변화 없는 거래는 싫다. 그렇다면 난 도대체 요행을 훔쳐 뭘 하려고 했을까. 공술 한 잔이면 십 리도 마다하지 않는다더니 내가 그 꼴이었다.
하긴 행운이 왔다. 그리 고민해도 나오지 않던 글감이 또굴또굴 기어 나와 이 글을 쓰고 있잖은가. 그러다가도 여행 중인 동생이 보내온 사진에 급구 마음 뒤집는다. 그래. 굴러온 일억이면 탄력 좋은 1천만원짜리 낚싯대를 살 수 있겠단 생각. 그리곤 에콰도르의 바르톨로메섬으로 곧장 떠날 수 있다는 거. 다금바리에 글라스아이나 잡으며 너끈하게 두어 달 보내야지. 김치가 그리우면 돌아와야지. 태백산 심마니가 캔 1천만 원짜리 산삼으로 입가심이나 하고 한잠 자고 나면 거뜬하지 않을까.
언뜻 미몽일지라도 이만하면 된 거다. 행운을 훔칠 결심은 성공했다며 소식 넣었더니 당신이 전하는 말. '이미 내가 나누어준 복. 그대는 도둑이 아닐세. 그러니 원 없이 더 가져가시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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