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잔치판의 구경꾼들

최경철 논설위원
최경철 논설위원

이제는 추억이 됐지만 두 아들을 키우면서 주말·휴일이면 꽤 바빴다. 아이들 운동 시합 관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종목 있었지만 축구가 기억에 남는다. 평소에는 낙제점 아빠였지만 이런 날이면 100점 아빠가 돼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공격수를 하지 못하고 수비수 또는 골키퍼를 맡거나, 심지어 벤치 신세가 되면 100점 아빠는 실망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꼬맹이들 축구 시합일 뿐인데 아이가 경기장에서 들러리를 섰다는 생각은 묘한 감정을 만들었다.

막판까지 열기를 뿜고 있는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바라보는 '보수의 심장' 대구경북(TK) 지역민들은 꼬맹이 축구 시합과는 차원이 다른 들러리의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당대표 선거 최종 후보 명단에 오른 4명 중 TK 출신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고, 최고위원 후보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TK 현역 의원들은 전무하고, 원외의 김재원 전 최고위원만이 유일한 TK 출신이다. 최고위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던 현역 재선 이만희 의원은 본선 구경도 못 한 채 컷오프에서 탈락하며 체면을 구겼다.

원내대표 주호영 의원, 비대위원 김상훈 의원은 중립성 시비를 불러올 수 있으니 이번 전당대회에서 당 지도부 도전이 어려웠다고 치자. 하지만 나머지 TK 의원들은 이런 사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잔치판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구경꾼이 됐다. 전례를 봐도 이번 전당대회에서의 TK 실종 현상은 심각한 지경이다. 비록 고배를 마셨지만 2021년엔 주호영 의원이 당대표 선거에 도전했고, 매번 전당대회 때마다 TK는 현역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배출했다. 이철우 경북지사도 2017년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된 바 있다.

국가든, 개인이든 힘을 측정할 때 의지와 능력 두 가지를 본다. 전당대회라는 정당의 최대 잔치에서 주인공이 아닌 구경꾼에 머문 TK 국회의원들은 둘 중 하나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두 가지 모두가 없는 것일까? 서울 근무를 하며 정치판을 몇 년 살펴본 결과, 후자에 과감하게 동그라미를 친다. 조수진·태영호 등 초선도 최고위원에 도전하는데 '초·재선이라서'라고 둘러대는 TK 의원들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의지의 박약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능력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정치인으로서의 재능이 갖춰져야 하지만 TK 의원들은 이 부분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정치 입문 전에 쌓은 식견을 믿고 있겠지만 정치인의 능력은 여기에서만 그칠 수 없다. 말하기·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명쾌하게 논증해 내고, 상대의 논리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웅변가가 정치인이다. 정치인의 유일한 무기는 말인데 웅변가적 능력이 모자란 사람은 당 지도부의 일원은커녕 정치인 반열에도 결코 오를 수 없다. 이번 전당대회에 나온 상당수 후보들 면면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TK 국회의원들은 TK의 대표다. 그러나 이번 전당대회에서 보여준 TK 의원들의 모습은 보수의 심장이라는 TK의 대표라는 기대감을 무너뜨렸고 책임도 저버렸다. 대의제 정당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대표성, 그리고 책임성의 위기를 동시에 노출시킨 것이다. 전체주의와 달리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은 주역으로 자라난 대표에게 보상을, 구경꾼으로 전락한 대표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주권자의 계절인 내년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