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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90> 어여쁜 얼굴에 장검을 든 검녀, 신선도이자 미인도

미술사 연구자

이재관(1783-1837),
이재관(1783-1837), '여협도(女俠圖)', 종이에 담채, 139.4×66.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새파란 칼날의 장검을 뽑아든 한 여성이 무릎을 경쾌하게 접은 날렵한 자세로 춤추듯 허공을 가로지른다. 활기찬 몸동작의 단아하고 어여쁜 미인이다. 세로로 긴 화폭이어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더욱 실감난다. 지상에는 붉은 잎이 드문드문한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보름달이 휘영청 하다. '소당(小塘)' 서명과 인장이 있는 이재관의 대작 '여협도'다.

칼을 든 여성인물을 흔히 검녀(劍女)라고 한다. 이 검녀는 의협심 있는 여성신선인 여협이다. 남존여비, 삼종지도, 부창부수의 유교사회 조선에서 여성협객이라는 파격적 인물상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여협은 문학작품에서 나왔다. 무협소설에서 협객은 뛰어난 무공을 지녔지만 부귀공명을 쫓거나 입신출세를 꾀하는 대신 약자와 소수자를 돕는 영웅적인 의리의 인물이고 여성협객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얼굴에 나풀거리는 옷맵시의 이 여협이 누구인가는 오른쪽, 왼쪽에 있는 강진과 조희룡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강진은 규장각 검서관에 오른 강세황의 증손자이고, 조희룡은 장안의 명사이자 이재관의 친구다. 강진의 시는 다음과 같다.

상망비입벽운두(霜鋩飛入碧雲頭)/ 서릿발 같은 칼끝으로 날아 푸른 구름 꼭대기로 들어가니

여협산동제일류(女俠山東第一流)/ 여협은 산동이 제일류라네

호장인면심사해(虎帳人眠深似海)/ 군영의 장막에서 사람들은 바다처럼 깊이 잠들었는데

만공성월업성추(滿空星月鄴城秋)/ 별과 달이 하늘에 가득한 업성의 가을이라네

제화시에 나오는 '여협', '산동', '업성' 등을 보면 이 여성은 당나라 전기(傳奇)소설 '홍선전(紅線傳)'의 주인공 홍선이다. 홍선은 산동 지방관의 여종으로 주인을 위해 무예적 재능을 발휘하고 떠났다. 원래는 신선이었다.

이재관은 홍선의 얼굴과 옷을 다른 필법으로 대비시켰다. 옷자락은 농담과 두께를 얹은 빠른 필선으로 일필휘지해 신체의 긴장감을 감필(減筆)의 맛으로 나타냈고, 이목구비는 가늘고 섬세한 필치다. 볼은 발그레한 홍조를 띠었고, 묶어 올린 새까만 머리칼은 흐트러진 듯 휘날려 미인을 그리려한 의도가 명백하다.

여협도는 조선 미인의 춘심(春心)을 주제로 한 현실적이고 풍속적인 기생이 아니라 중국문학에서 나온 먼 당나라의 신비로운 존재에 대한 낭만적 환상인 비현실적인 여협을 미인의 기준으로 삼은 19세기 미인도다.

여협도는 특이한 유형의 신선도이자 미인도로 감상됐다. 칼을 휘두르는 검녀의 위험하면서 고혹적인 별난 이미지는 미인의 새로운 형상화다. 문학작품 속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는 고사인물화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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