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남광희 광복회 영덕지회장 "할아버지 남호연 님 뜻 기려 독립유공자 발굴 힘쓸 것"

경북 영해(영덕군)서 한강 이남 최대 만세운동…30세 농민 남호연 씨, 일제 주재소 파손해 징역형 선고
손자 남광희 지회장 "뿌리를 알지 못했거나 뒤늦게 아는 이들 있을 것, 독립유공자 발굴 동참해 주시라"

남광희 광복회 영덕지회장
남광희 광복회 영덕지회장


"영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일제에 저항한 할아버님 뜻을 기리고 다른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 데 힘쓰겠습니다."

남광희(68) 대한광복회 영덕지회장은 1일 104주년 3·1절을 맞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한강 이남 최대 만세운동이던 영해(영덕군의 옛 지명) 만세운동에 참여한 남호연 씨의 손자다.

당시 영해 지역민들은 국내 독립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3월 1일 이전부터 이미 국지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지품면 야소교(기독교) 북장로파 교회 전도사인 김세영이 이 지역 교회 전도사들을 잇따라 만나며 전국적 3·1 독립만세운동 배경과 당위성을 알려주고 만세 의거를 권유했다.

전도사들은 영해 장날인 3월 18일 오후 1시부터 영해시장을 중심으로 독립만세 의거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상화, 서삼진, 조영환, 권영조 등 많은 우국지사들이 그들이 살던 동리의 주민들이나 친인척, 기독교 신자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성내리에서 시작해 병곡면, 창수면, 축산면까지 영해 북부 4개면 주민이 집단으로 만세운동에 나섰다.

남 지회장은 할아버지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1992년 국가보훈처 유공자 발굴 사업 결과로 알았다. 보훈처가 남호연 씨의 재판 기록 등을 확인, 이를 근거로 그에게 대통령 표창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파악된 경북(대구 포함)의 3·1운동 유공자는 984명에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남호연 씨는 당시 30세 농민으로, 만세운동을 진압하던 일제 경찰에 저항해 영해주재소(파출소) 기물을 파손한 혐의로 붙잡혔다. 같은 해 6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고, 의거 20년 뒤인 1939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 지회장은 "부모님 생전에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기도 했고, 독립운동 참여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털어놓기 힘들던 사회적 분위기 탓도 있었을 것"이라며 "당시 나는 건축업에 몸 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였음을 뒤늦게 알고는 곧장 광복회에 가입했다. 본업보다도 다른 독립유공자 발굴에 더욱 힘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할아버지가 강제 진압되는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구타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실제 당시 영해 독립만세운동 참가자 가운데 8명이 숨지고 16명이 다쳤다. 사망자 가운데 3명은 신원조차 밝히지 못했다.

그는 이후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이 매년 주최해 온 삼일절 기념식에 참석하며 할아버지를 비롯한 조상의 뜻을 기리고 있다. 올해 행사에도 다른 광복회원들과 함께 참석했다.

남 지회장은 "독립만세운동이 벌써 100여년 전 일이라 선대는 모두 돌아가셨고 2대도 상당수는 안 계신다. 나처럼 뿌리를 알지 못했거나 뒤늦게 알게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이 독립유공자 발굴에 동참해주시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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