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대구 굴기와 삼국유사

이권효 대구가톨릭대 교수

이권효 대구가톨릭대 교수
이권효 대구가톨릭대 교수

나에게는 독일어로 번역한 삼국유사(464쪽)가 있다. 독일 대학에서 한국 문화를 가르치던 김영자 교수가 어려운 과정을 거쳐 번역해 2005년 출판했다. 그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제도서박람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관심을 모았다. 김 교수는 독일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너무 낮아 한국을 알리는 통로로 삼국유사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신문기자로 일할 때 독일어 번역 과정에 참여한 인연으로 독일어판 삼국유사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삼국유사는 영어를 비롯해 일본어, 중국어, 베트남어, 체코어 등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됐다.

7월이면 경북 군위군이 '대구광역시 군위군'으로 바뀐다.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군'처럼 삼국유사는 군위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 고려 충렬왕 때 국사(國師·나라의 스승이라는 최고 지위의 승려)인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이 군위 인각사이기 때문이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9세 때 광주 무등산의 사찰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14세 때 강원도의 사찰에서 승려가 됐다. 73세 때 대구 달성 인흥사에서 삼국유사의 기초 자료를 정리했으니 삼국유사는 대구에서 집필을 시작한 셈이다.

삼국유사는 표면적으로는 불교와 신라 중심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흐르는 정신은 훨씬 깊고 넓다. 삼국유사에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5가지 이야기를 담은 '효선' 편이 있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과정은 부모형제와 헤어지고 세속의 인연을 끊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어쩌면 더 큰 효도를 위해 잠시 집을 떠나 공부하는 과정이 출가의 깊은 뜻일 수 있다. 일연 스님이 국사가 된 후 2년도 되지 않아 그만두고 고향 쪽으로 돌아온 이유도 평생 홀로 지낸 노모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노모를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스님은 삼국유사에 집중하여 집필을 마칠 수 있었으리라.

삼국유사에는 불교와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를 논어에 기록된 공자에 관한 언급(권4 '의해' 편)에 견주어 말하는 부분이 있다. 15자로 짧지만 공자의 삶을 잘 알아야 인용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일연 스님의 삶과 사상의 폭을 엿볼 수 있다. 시호가 넓게 깨달았다는 의미의 보각(普覺)은 스님의 주체적이고 융합적인 삶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시정을 맡으면서 강조하는 목표가 '대구 굴기'이다. 굴기(崛起)는 힘차게 일어난다는 뜻인데, 단순히 몸을 펴는 동작이 아니라 틀을 바꾸는 질적 도약을 의미할 것이다. 굴기는 그 진취적 의미가 좋아 여러 영역에서 쓰고 있으므로 대구 굴기라고 해서 저절로 그 고유한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굴기라는 말이 대구와 연결되려면 굴기를 뒷받침하는 철학이나 정신적 가치가 필요하다.

대구 굴기의 정신적 에너지를 삼국유사에서 발견하고 활용하면 어떨까. 삼국유사에 흐르는 일연 스님의 인간적이고 주체적이며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태도가 매우 좋다. 대구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오래된 편견을 극복하는 품격 있는 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구시 군위군이라는 역사적 상황이 행정구역 조정에 따른 대구 편입이라는 무미건조한 의미에 그친다면 이는 매우 아쉬운 일이다. 삼국유사에 흐르는 일연의 삶을 연결해 대구 굴기의 깊은 뜻을 시민들이 공유하는 방안을 대구시가 고민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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