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극단 작은방 <견고딕-걸>(작, 박지선, 연출 신재훈,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살인 사건 피의자 엄마 최진희(김채원 분)의 대사 한마디가 송곳처럼 박혔고 세월호, 이태원 참사(10, 29 慘事)의 장면들이 기억의 장면들로 파고들었다. 한국 사회 도심과 지하철 선로에서, 선박과 크레인의 고공에서 죽음의 맨홀로 빠져버린 혼령(魂靈)들이 굵은 견고딕체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광기와 분노의 묻지 마 총기 난사로 교실 바닥으로 쓰러져간 수십 명의 죽음은 이국 영토 생방송으로 벌어지는 참사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 장면들이다. 지난해 국내 제빵 대형 프랜차이즈 기업에 빵을 납품하는 업체에서 일하다 배합기로 빨려 들어가 숨진 20대 여성 노동자의 죽음을 두고 인터넷에서는 공장의 '안전부실' 책임과 근무 수칙 매뉴얼로 '갑론을박'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연극<견고딕-걸>은 일란성 쌍둥이 고등학생 김수민(서지우 분)의 동생 수빈이 2년 전 전철역 플랫폼에서 한 학생(한지은)을 선로로 밀어버리고 자신도 몸을 던져 사망하면서 살인의 피의자 가족이 되어 버린 이야기다. 국립극단 청소년극 창작 벨트를 통해 낭독극(2020)으로 소개된 뒤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연극은 철도 살인의 실체적 진실을 파고들지 않는다. 사회적 살인으로 치닫는 한 인간 내면의 광기로 분화(噴火)하는 갈등으로 극의 퍼즐을 맞추지 않는다는 점이 신선하다. 죽은 동생을 대신해 피해자 가족을 향해 한 발씩 내딛는 언니 수민의 만화경 같은 순례길 같다. 이미지와 짤툰 영상을 선호하는 MZ 세대처럼 발랄하게 그려지면서도 기억으로부터 사회적 책임과 의무가 맞닿아 있는 죽음 앞에서는 통증으로 아프고 스크린으로 투사되는 해시태그 이모티콘과 대사, 지문의 입체적인 자막 처리는 등장인물 내면의 별풍선을 형성하며 무대의 장면을 마치 웹툰 컷으로 분할시킨다. 이러한 연출방식과 장면의 구도는 견고딕처럼 단단하면서도 가족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와 우리가 기억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 치유의 순례
극 중 인물 수민이를 한글 서체 견고딕 캐릭터로 형상화된 것부터 강렬한 시선을 끌었다. 굵은 글자체로 나열된 <견고딕-걸< 포스터에 주인공 수민은 두 눈만 응시한 채 견고딕 한 세상에 갇혀 있는 이미지이다. 동생과 피해자의 죽음으로부터 장례가 끝나지 않은 상중(喪中)의 형상이다. 동생 수빈의 사건 후부터 견고딕-걸 ID를 쓰며 상복(喪服)으로 형상화되는 검정 옷으로 자기 내면을 드러내고 마치 영화 샌과 치히로의 얼굴 형체를 알 수 없는 가오나시 메이크업으로 살아가는 수민이다. 세상을 행해" 나 견고딕체로 말한다. 볼드까지 넣는다. 내 면상에 신경 꺼! 내 인상 내 인성 내 인생에 신경 끄라고!" 외치면서도 견고딕 한 형체의 벽은 당당하면서도 사회로부터 스스로 고립되어 가는 수민의 내면이다. 동생의 살인은 일란성 쌍둥이 언니의 마녀사냥 먹잇감이 되고 수빈의 사진은 수민의 얼굴로 인터넷에 넘쳐난다. 동생 태블릿에 <오리엔트 특급살인>, <악령>, <시체 안에서>라고 적힌 이상한 글도 수민이가 적어 넣은 글들이다. 수빈이는 수민과 동일시되고 에어팟을 꽂고 견고딕 한 옷차림으로 도심의 순례길을 내딛는 <견고딕-걸>의 무대는 개방적으로 4면이 열려 있다.
무대 좌우로 배우들 등 퇴장 통로가 되고 극의 흐름을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배우들은 멀티로 분하며 소품과 대소도구로 극 중 놀이처럼 장면을 만든다. 무대 정면 중앙 위 스크린으로 투사되는 대사와 지문, 심리상태들은 배리어프리 공연으로 확장되면서도 글자 형태의 이미지, 영상과 그래픽은 심리상태와 장면의 질감을 드러내며 무대 공간으로 발화되는 언어로 확장된다. 퍼커션과 건반, 베이스 라이브의 연주들도 눈에 띄는데, 극과 배우들의 움직임을 음악적 멜로디로 장면을 연결하는 방식에서 극 중 인물들의 대사와 심리적인 감정 상태, 인물의 내면으로 중첩되는 언어의 리듬이 되고 있다. 견고딕 옷차림으로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 터미널 승강장의 트랙1의 현재에서 트랙2부터 2년 전 동생 수빈의 사건으로 가족을 죽음의 맨홀로 몰고 간 이야기로 돌아간다. 성공하는 법, 자기계발서를 쓰며 삶을 리셋 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며 사회적 강사로 성공한 엄마 최진희(김채원)는 독서실에 간 수빈이가 누군가를 죽이고 딸도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가족은 혼돈과 균열의 싱크홀로 빠져들게 된다. 엄마는 철도로 밀어버린 딸아이의 살인과 죽음을 아스퍼거 장애 때문이라고 말하고 남극 과학기지 기상대원인 아빠 김우철( 박세정 분)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라며 묻어두라고 한다. 사진이 신상털기식으로 인터넷으로 퍼지고 소셜미디어 해시태그로 달리는 동생 수빈과 동일한 살인자로 몰아가는 악성 댓글의 폭력적인 조롱들은 수민을 더욱 견고딕 한 고립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검정 룩으로 숨기고 살아간다. 무대의 스크린의 입체적인 해시태그가 팡팡거리는 효과음으로 달리고 극 중 트랙 장면으로 형상화되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불특정 대상을 향한 묻지마 살인 이야기다.
◆무대와 장면은 웹툰 같고, 죽음은 견고딕한 세상으로.
자기계발에 비법을 들려주고 있는 수빈이 엄마 진희가 죽은 아이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스피거 증후군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딸아이의 충동적인 살인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다. 아빠 우철에게 딸아이의 기억과 한지은의 죽음은 잊힐 권리로 망각되어 가는 죽음이면서도 진희를 향해 우철은" 그럼, 직접 찾아가서 무릎 꿇고 사과해야지. 근데 왜 우리가 못하지?" 용서의 속죄는 가해자 가족이라는 두려움으로 외면한다. 피해자 부모를 향해 걸어가는 수민을 향해 가지 말라고 하면서도 수민이는 미나의 해킹으로 알게 된 지은의 심장을 이식받은 강현지(임예슬 분)를 만나러 서산으로 향한다. 장례식장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현지의 능청스러움에 웃음이 터지고 찜질방 욕탕으로 달려가 백조의 호수 음악으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하며 심장의 바운스를 느끼는 장면은 뭉클하다. 강현지의 심장이 날마다 팔딱팔딱 뛰는 아르바이트 속옷 전문점에서 가오나시 견고딕 걸로 살아온 수민은 미나의 각막과 현지의 심장으로 세상을 리셋하며 바라보기 시작한다. 세 명의 대사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는 수민의 가사 말처럼 리듬이 살아나고 유쾌한 수다의 욕설들은 퍼커션과 건반으로 '삑삑' 거리고 베이스와 비트박스의 리듬으로 살아나는 지문의 문장들은 스크린으로 입체적으로 확대되며 장면과 이미지가 웹툰 풍경을 형성한다.
찜질방 욕탕 장면이다. 강현지 가슴으로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수민이와 아이의 죽음에서 벗어날날 수 없는 진희의 절규가 교차 되는 장면으로 대비시키는 연출의 감각이 선명하게 돋보인다. 마지막 장면은 한지은 부모님을 향해 윤미나의 각막과 강현지의 심장으로 달려가는 동화 같은 풍경이 그려진다. 수민이 용서의 순례길은 피해자 가족의 마음으로 세상과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각막의 시선으로 사라져간 죽음의 심장 박동 소리를 느끼며 한국 사회를 돌아볼 때, 견고딕 한 옷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묻지마 살인, 총기 난사와 사회적 참사가 죽음으로 들끓는 사회는 여전히 상중의 견고딕 한 세상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즉흥의 놀이처럼 질주하며 카툰의 한 장면처럼 트랙의 장면을 연결하는 배우들의 연기와 앙상블로 견고딕 한 극이 되었다. 연출은 두 사람의 죽음과 사건이 현실적이면서도 동화와 만화경 같은 15트랙(장면)의 파편적인 옴니버스를 마치 음악 트랙을 연속적으로 듣게 하는 연출의 감각은 <열하일기>, <오셀로와 아이고>, < 아가멤논>, <템페스트>, <금조이야기>를 돌아오며 무대를 형상화하는 시선이 견고딕체 처럼 안정적이면서도 아쉬운 점은, 주인공 수민이와 가족의 이야기가 무대 재료들에 가려 만화경 처럼 스쳐갔고 아픔의 절규가 각인(刻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견고딕-걸> 뮤지션은 작곡, 건반(고수영, 최율태), 타악기(윤두호) 음악감독은 <김종욱 찾기>의 정준이 맡았다.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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