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초고령화 사회에서의 도시 산책자

김희경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김희경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김희경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한국에서 지하철이 등장한 시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1970년대다. 당시 경제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지하철 준공을 반대하는 의견도 상당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진전되고 도시 규모가 급격하게 팽창함에 따라 외자까지 유치해 지하철을 건설했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지하철 운영 적자 문제는 지하철 설립 단계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령층이 지하철을 활발하게 사용하지는 못했다. 당시 준공된 1기 지하철은 교통취약계층을 위한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등 편의시설이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노인들은 이전보다는 지하철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인 승객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정도에 불과한 2010년대에도 '노인 무임승차 폐지 서명'이 검색어 1위를 차지할 만큼 노인 승객은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서도 지하철에 몸을 맡긴 채 '공짜 여행'을 즐기는 노인 승객들의 지하철 이용 방식을 문제시하는 기사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필자 역시 노인 승객의 지하철 이용 방식에 관심을 갖고 인류학적 참여 관찰 연구를 실시한 바 있다. 노인 승객들이 지하철과 그 주변 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을 보며 필자는 발터 벤야민이 제시한 '도시 산책자'가 떠올랐다. 벤야민은 도시라는 근대적 공간이 나타나면서 "도시를 가로질러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하고 도시의 광경, 소리, 냄새를 즐기는 산책자"라는 새로운 주체가 탄생했다고 보았다. 전통시장이 있는 역에서 노인들은 물건을 한참 구경하고, 가격을 흥정하면서 '사회적 짐'이 아닌 '소비자'로서 경제활동에 참여했다. 노인들은 건강을 지키기 위해 등산을 할 수 있는 역에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장소를 방문하는 노인들도 많았는데, 전쟁기념관이 있는 삼각지역이나 한국전쟁 시 참전했던 장소를 둘러보면서 '산업 역군'이자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던 그들 세대의 노고와 의미를 되새겨 보기도 했다.

벤야민이 제시하는 도시 산책자는 도시를 가로지르며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만끽하면서, 도시 생활의 장관을 관찰하고 음미하는 중산층 백인 남성이었다. 반면, 한국적 맥락에서 도시 산책자는 보편적 복지의 부재로 손에 쥔 것은 없는데, 집에만 있는 것도 불편해 집 밖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과업이 되어 버린 남성 노인들이 대다수였다. 도시 공간을 즐기며 장소에 생기를 불어넣는 벤야민의 도시 산책자와 달리, 한국의 도시 산책자는 집을 나서도 딱히 기다리는 사람도, 갈 곳도 없어서 도시를 부유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지하철은 각지에 있는 양질의 노동력을 신속히 노동 현장에 투입하려는 자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고안된 근대적 운송 수단이다. 환언하면, 지금까지의 지하철은 자본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자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노인 및 장애인의 몸을 배제해 왔던 공간이기도 하다. 인구 고령화가 빠르게 진전되는 한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지금 우리는 경제적 부담을 앞세워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배제할 것인지에 대한 논리를 짜는 데 시간을 쏟을 것이 아니라, 도시 기반시설이 지금까지 배제해 왔던 다양한 몸을 가진 시민들이 도시를 자유롭게 이동하며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교통 공간을 장기적으로 어떻게 재편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나이가 덜 들었다는 이유로, 돈이 없다는 이유로 공공 공간에서 시민을 배제하는 선례를 남기기보다는, 언젠가 노인이 될 미래 세대가 지금의 노인 세대보다도 좀 더 풍요롭게 도시 산책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장기적 관점에서 도시 기반시설의 운영 방침을 조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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