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가끔 왔던 카페. 그 자리에 앉았어요.
'윤영 님! 2020년 11. 28' 그녀가 죽기 두 달 전에 쓴 내 이름자. 2년이 지났지만, 혹여 온기라도 남았을까 싶어 쓰다듬어 봅니다. 투병 중인 작가에게 사인본을 예약하고 우편으로 받은 마지막 시집인 거지요.
'잊어버린 건지 기억하는 건지 비가 내린다' '입김' 전문을 읽는데 거짓말처럼 봄비가 내립니다. 잎눈에 꽃눈에 닿자마자 부서지는 비의 몸뚱어리. 곧장 '비'가 아닌 물. 시만 남고 '죽은 시인' 묵직하지만, 보편적인 주제일 수도 있는 죽음. 딱히 말하자면 '있다는 것과 없다'에 대한 목소리가 맞을 듯합니다. 대관절 생사를 가름하는 기준은 뭘까요.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를 대개의 학자는 죽음이라고 하잖아요. 나는 과학적 판정법이 아닌, 예컨대 뭉게구름이 흩어지는 속도? 만두피를 접고 펼치는 두께? 들 찔레 서너 송이의 부피? 아기가 달고 있는 속눈썹 무게? 이런 부드러운 죽음의 단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당신도 일흔까지만 살고 인생을 끝낼 거라는 둥 그런 엉뚱한 생각은 내팽개치세요. 그대만의 독단을 서슴없이 개입시키며 기필코 진행할 거라던 말. 그리 달가워 보이진 않더군요. 천하의 명의였던 편작(扁鵲)도 죽음을 관장하지는 못해요.
사실 근자에 들어 죽음과 이별, 죽은 자와 산 자를 두고 혼돈이 잦습니다. 물론 죽음의 범주에 이별이 포함되겠지만요. 가령 오래전 아프리카로 떠난 선배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들었다면 죽음의 범위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건지. 그렇다고 이별을 죽음으로 분류하진 않을 테고. 그럼 없는 사람도 이별이라 생각하면 산 자가 아닐까요. 일례로 44층의 사기꾼은 나에겐 투명인간이니 죽은 자가 맞겠죠.
또 하나. 죽음에도 농도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예를 들어 50년을 마주 보며 살던 앞집 아저씨가 하늘로 갔다고 칩시다. 아무런 심경의 변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연예인이나 딱 한 번 만났던 사람의 부재가 긴 상처로 남기도 하잖아요. 이런 걸 보면 슬픔의 농도는 굳이 시간이나 잦은 만남의 비례와는 상관없나 봅니다.
이쯤에서 왜 엔트로피의 법칙이 떠올랐을까요.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오직 질서화에서 무질서화로 변화한다는 법칙. 태어나는 순간 생명은 공정하고 합당한 질서에서 무질서가 내재 된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 저승사자의 안내를 따라간다는 느낌.
그렇지마는 죽고 나면 한 사람의 생애가 끝막음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있고 없고 차이는 죽은 자와 산 자, 산 자와 산 자의 몫이니까요. 제게 죽은 시인은 산 자가 되고 살아있는 사기꾼은 죽은 자로 남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한 끗 차이가 억겁으로 와닿습니다.
'어디 가닿지 못하고 국지성 호우 속에 수십년 갇혀 있는 비'. 마지막 줄을 읽으며 성에 자욱한 유리창에 입김을 불며 없는 시인의 이름을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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