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건표의 인세이셔블 연극리뷰]인간의 숙명과 싸우는 한국사회의 비극..국립극단 심재찬 연출의 ‘만선’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만선, 국립극단 제공
만선, 국립극단 제공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

◆ 한국연극 사실주의 사공이 젖는 만선의 뱃길

무대는 어촌 바다 냄새가 진동하고 거대한 폭우는 사실적인 전경을 뚫고 관객의 감각을 깨웠다. 배우들의 연기는 한국인의 정서가 울렸고, 전작 공연보다 무대는 극으로 승부를 걸었다. 심재찬 연출 '만선'의 이야기다. 남해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천승세 작가의 <만선>(윤색 윤미현, 국립극단)이 국립극장 현상희곡으로 당선된 게 1964년이다. 그해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최현민 연출로 초연된 후 60년을 돌아 이원경, 차범석, 임영웅 선생의 한국연극 사실주의 계보(系譜)를 잇고 있는 심재찬 연출에 의해 공연된 재공연(2023 국립극단 레퍼토리)은 전작 공연보다 완숙된 리얼리즘의 전경을 보여주었고 현대적인 감각과 시선으로 만선을 그려냈다. 70.80년대 대가들의 조연출을 거쳐 90년대에 전망을 창단한 뒤 다수의 작품을 연출한 연극연출가였지만 작품평가는 연극행정가에 가려 인색했다. 무대를 조련하는 연출가보다는 한국연극의 방향을 진단하는 연극행정가라는 수식어로 그를 불렀다. 아쉽기 때문일까. 반세기를 연극무대에서 버틴 연출도 문화 권력 시대의 '연극행정가', '대구문화재단 대표', '2020 연극의 해' 집행위원장을 돌아오면서 심재찬을 연극연출가로 말할 수 있는 대표작품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산울림 50주년 <앙상블>(2019)을 통해서는 번역극의 섬세한 감각이 살아났고 신춘문예 단막극<강신무>(2021)에서는 원작을 복원해 사실적 전경으로 무대를 배치하는 노련함 보여주었다. 60년대 <만선>의 바다는 대를 이어 죽음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에서 심재찬 연출 만선의 바다는 한국 사회 부조리한 질서와 제도, 자본의 권력과 착취, 인간과 사회폭력에 맞서 가난과 싸워도 가난한 숙명의 그물을 찢어내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한국 사회의 비극으로 형상화했다. 바다로 나간 곰치 일행의 점괘를 치는 무당(조주경 분)의 굿판에서는 도사의 점괘로, 무당의 굿판으로 한국 사회의 운명을 내다보는 정치권 논란이 떠올랐다. 청년 도삼(황규환 분)이와 연철(성근창 분)의 죽음은 영끌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도 치솟는 고금리로 빚더미에 허덕이며 연애, 출산, 결혼, 인간관계, 아파트까지 포기하고도 죽음까지 내모는 오포 세대들의 현실을 자극했다.

슬슬이(강민지 분)는 자본과 인간의 욕망으로 성을 농락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폭력의 그물에서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의 절규를 드러냈고 곰치(김명수 분)가 바다로 쌍돛대를 띄우고 부서(보구치) 때를 쫓아 떠난 뒤 내려치는 폭우는 장엄했다. 정점을 향하는 장면이다. 아들 도삼과 슬슬이를 사랑한 연철마저 죽음으로 삼켜대는 바다로 마지막 핏줄 갓난애를 구포댁(정경순 분)이 배로 실려 보낸다. 죽음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는 구포댁과 곰치의 삶은 갓난아이마저 죽어야 삶이 되는 운명의 비극이다. 아이는 죽음이 아니라 만선의 대를 끊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야 살 수 있는 삶이다. 남자아이 셋을 잃고 딸마저 죽어야 살 수 있는 기구한 삶으로 미쳐가는 구포댁의 갓난아이는 미래 한국 사회 세대들을 향해 그물에 갇힌 비극적인 삶을 구원해 달라는 절규의 신호처럼 들린다. 그물을 걷어낼 수 없는 곰치와 구포댁의 삶으로 거친 폭우를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숭고하기까지 했고, 이들 가족의 비극에 눈을 감았다.

만선. 국립극단 제공
만선. 국립극단 제공

이번 작품에서는 장엄하면서도 숭고한 폭우의 빗줄기로 무대를 형상화한 것도 극의 분위기를 사실감 있게 구현해낸 연출 감각은 전작 공연에 비해 촘촘해져 있었다. 무대는 전경의 분위기를 뚫고 삶으로 전달되었고 자연현상을 감각적으로 전달되고 느낄 수 있도록 방파제 공간을 확장하고 슬슬이의 내면을 더 구체화하며 장면의 질감을 사실적으로 살려낸 것도 큰 변화다. 심재찬 연출 만선의 폭우는 무대의 방파제를 넘어 거친 파도와 빗대, 바람 소리로 마치 구포댁 삶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았고 슬슬이의 항아리 물동이가 무대 바닥으로 깨지는 장면에서는 극 중 인물의 내면을 들추어내는 사실적인 설정으로 관객의 감각을 찔렀고 한 관객은 물동이가 깨지는 사이로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배우들의 절제 된 연기도 만선의 무대를 채웠다. 국립극단 출신의 김재건 선생은 범쇠 역할에서 선주 임제순의 역할로 돌아와 자본가의 폭력적 내면과 캐릭터를 노장의 연기로 발화시켰다.

선생의 연기는 삶의 복제하는 재현의 연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이자 인물이다. 구포댁 정경순은 아들 셋과 딸, 그리고 갓난 막둥이마저 죽음의 바다로 내몰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과 삶의 절규를 전작 무대보다 완숙한 연기로 표현했다. 어머니의 아픔이 가슴으로 박혀 몰입해 있었고 " 나는 고집 부리는 것이 아니다! 내 조부님이 그러셨어. 만선이 아니면 노 잡지 말라고 하셨어. 그물을 손에서 놓는 날에는 차라리 배를 갈르고 말 것이야" 말하며 자식의 죽음에도 만선의 욕망에 미련스러울 만큼 숙명으로 순응하는 곰치(김명수)의 연기는 60, 70년대 아버지의 아픔을 베어내게 하면서도 폭우에도 죽음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는 삶은, 가부장적인 전통의 질서와 제도가 붕괴되고 있는 이 시대의 아버지로 전환되어야 할 한국 사회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할 정도로 강한 남성상을 표현해 주었다. 바다로 밀려간 갓난아이의 세대를 상상하게 했고, 배우의 연기는 아팠다. 극장의 공간을 타격하는 배우의 대사(화술)는 명료하면서도 감정은 절제되어 있었다. 카메라를 향해 앵글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무대와 현존하는 곰치의 삶과 숨결로 인물을 살려냈다.

다양한 인물과 배우의 연기가 공존하는 작품의 무대에서 배우들의 고른 연기를 평가받기 쉽지 않은데, 이번 작품에서 국립극단 젊은 시즌 단원과 몇몇 역할을 교체하면서 작품은 사실적인 전경으로 살아 움직였다. <만선>의 뱃길에 올라탄 배우들의 연기는 어촌의 삶으로 살아있었고 극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인물의 캐릭터는 삶과 인생으로 한국 사회 비극의 전경을 만들어 냈다. 주, 조연이 있으면서도 등장인물들의 연기는 무대를 채울 정도로 앙상블의 조화를 이루었고, 심재찬 연출이 선주 임제순을 김재건으로, 범쇠 역할을 박상중으로 교체한 것은 극의 완성도를 살려낸 캐스팅의 한 수 였다. 이번 공연에 합류한 범쇠 (박상종 분)은 자본의 폭력성을 들어내며 슬슬이의 저항으로 죽음에 이루는 장면까지 배우의 내면이 변화되는 역할을 보여주었고 "이놈, 저놈" 하며 만선에 미쳐있는 곰치를 구박하는 성삼(김종칠 분)은 연륜으로 체득된 연기를 보여주었다. 조주경, 김경숙은 무당과 동네 아낙 그대로다. 이태섭의 무대는 한국적인 화폭처럼 강하면서도 연출이 배치하고 조련하는 극 뒤로 스며들어 장면은 과하지 않고 분위기는 어촌의 생동이 넘쳤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번 공연에서 방파제 공간을 확장한 범쇠와 슬슬이의 장면이다. 농락하려는 범쇠를 향해 " 다 죽어 부렸는디..그깟 이 만원이 뭔 필요여?(중략) 슬슬이가 네 배에 잡혀 올라간 물고기다니? 내 허벅다리를 네 배에 태우는 게 만선이간디? 대체 믓이 만선이여? 누구를 위한 만선이여?"하며 격렬한 저항으로 낫과 돌더미로 내려쳐 범쇠가 죽은 후 숨통을 끊으려 헛간까지 걸어가는 내면의 비극성이 움직임 시간을 채워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연출은 무대의 시간을 고려해 방파제부터 헛간까지 시간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몇 가지 장면 중 그 장면이 슬슬이를 들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으로 국립극단의 60년대 한국희곡의 재발견은 심재찬의 <만선> 이전과 이후로 기록될 만큼, 마지막 남은 한국 사실주의 사공이 젖는 만선의 뱃길은 기록될만하다.

심재찬 연출이 다시 무대로 돌아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연출 스타일을 버리고 동시대 연극의 시간을 읽으며 무대의 감각을 잊지 않으려는 노장의 자세이다. 술판을 좋아해도, 심재찬 연출이 대본(희곡)의 행간을 무대 언어로 발견하기 위해 데뷔 무대처럼 작품을 대하고 섬기고 있다는 것을 전망 창단 공연을 보고 시간을 돌아 이번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만큼 잘 만들었고 대표작품이 된 <만선>으로 그를 연출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4월 9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작품은 '만선'이고 1층 관객은 '만석'이다. 한국연극 사실주의 풍경을 무대로 체감하고 싶다면 꼭 봐야 할 작품이다. 여전히 바다로 떠내려간 구포댁 갓난아이 세대 동시대의 삶은 한국 사회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70년대의 산업화와 80년대 격렬한 민주주의 통증으로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지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정부로 이어지는 동안 한국 사회는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이 되었는데도, 만선처럼 여전히 청년들의 죽음과 가족의 비극은 넘쳐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그물'은 언제쯤 걷힐까.

만선. 국립극단 제공.
만선. 국립극단 제공.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