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두고 온 여름

성해나 지음/창비 펴냄

게티이미지뱅크

성해나 지음/창비 펴냄

어린 기하와 재하는 부모의 재혼으로 만났다. 성이 달라도 형제여야 했지만 둘은 결국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영영 남이 돼 버린다.

지난해 첫 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을 펴낸 성해나 작가의 신작이다. 첫 소설집에서 성 작가는 나와 타인,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진중하고 미더운 시선으로 탐사했는데 이번 신작 역시 타인에 대한 이해 단상을 담았다.

실패한 이해와 닿지 못한 진심. 책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다.

이야기는 형 기하와 동생 재하의 회상이 차례차례 교차되며 풀어진다. 시작은 형 기하의 회상. 어릴 때 친모를 여의고 사진사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온 기하는 열아홉살이었던 그해 여름, 아버지의 재혼으로 재하 모자(母子)를 가족을 맞는다. 하지만 새 가족에 대한 기하의 적응은 좀처럼 쉽지 않다. 그에게 재하 어머니는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언젠가는 떠날 객식구처럼 느껴진다. 여덟살 어린 동생 재하의 지나친 밝은 모습이 부담스럽기만 한다.

그의 마음을 더 뾰족하게 만드는 건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 어떤 일이든 재하와 함께하고 재하의 의중부터 살피게 된 아버지를 보며 기하의 마음 속엔 실망과 원망이 켜켜이 쌓여가고, 그런 그의 마음을 보살피려든 재하 어머니가 건넨 서툰 애정마저도 성가신다. 모난 마음과 울퉁불퉁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스무살이 되자마자 서둘러 집을 떠난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동생 재하의 기억은 어떨까. 형 기하가 집을 떠나고 재하의 친부가 벌인 사건으로 어머니와 새아버지는 재혼 4년 만에 갈라섰지만 재하는 모두 함께였던 그 시절을 가끔씩 되뇌인다. 새 아버지는 폭력적이던 친부와 달리 세심하고 자상했고, 도무지 곁을 내주지 않는 기하 형과 그를 천번이고 이해할 수 있다던 어머니. 그 속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기대지 못하고 외로이 지나온 시간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외로웠던 시간 속 따스함도 많았다. 아토피가 극심했던 자신과 병원에 동행해줬던 기하 형과 치료가 끝난 뒤 함께 먹던 중국 냉면, 땅콩 소스를 풀어주며 지었던 형의 미소.

'아무 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다.'

이들이 제대로 매듭 짓지 못한 어린시절 관계와 감정은, 기하의 기억 위에 재하의 기억이 포개지며 마치 퍼즐처럼 완성된다. 상대에게 다정하려는 노력과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애씀이 서로를 더 멀어지게 만들어버린 이상하고 슬픈 일들이 기억의 낙차를 거슬러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전달되는 셈이다.

이야기는 다시 기하. 부모의 이혼으로 멀어진 기하와 재하는 15년 뒤에 다시 만난다. '스트리트 뷰'로 우연히 재하 모자를 발견한 기하는 그들이 운영하는 중식당에 찾아간다. 외면하고 도망치기 바빴던 기하의 옛 감정은 15년이라는 세월과 함께 희미한 부채감으로 남았다. 오히려 반갑고 은근히 그립기까지 하다. 그 마음과 함께 찾은 중식당엔 예전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라진 동생 재하가 있다. 혼란스러우면서도 씁쓸한 재회 속 둘은 그간 사연을 더듬더듬 나누지만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다. 그렇게 다시 헤어진 둘은 과거와 다른 현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서로에게 완전한 과거로 남을까.

기하와 재하, 두 사람의 이야기는 '더 다가갔다면', '더 용기냈다면'과 같은 후회를 불러일으키기보다 수없이 어긋나고 멀어졌던 우리의 인연들에 대해 다독여준다. 어떤 이해는 불가하고 어떤 오해는 필연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아쉽게 놓쳐버린 한 순간을 섣부른 비관이나 막연한 긍정 없이 정확하고 조심스럽게 돌아본다.

두 번째 기하의 이야기가 끝나고 마지막 재하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과거의 상처에 매여 있던 재하는 비로소 연이 끊난 기하를 생각하며 새 삶을 향해 간다. 찬란한 전진. 재하의 새 발걸음은 우리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두고 온 한 시절을 너른 품으로 껴안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172면, 1만4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