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싶다] <13> 대릉원의 봄

봄비에 '뚝뚝' 떨어지는 고분 속 목련 꽃잎…황남대총 뒤 '포토 존' 목련꽃 활짝
신라 봄 상징 '인증 샷' 여행객 붐벼
첫 김씨 왕 '미추왕릉' 대릉에 조성…'마립간' 왕권 과시 위해 더 큰 봉분
천마도 있어 붙여진 이름 '천마총'…노서, 노동리 고분 산책길로 사랑

경주에 봄이 왔다. 대릉원
경주에 봄이 왔다. 대릉원 '포토존'으로 유명해진 목련나무가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봄꽃은 피는 순서가 있다. 불같은 성격이어서 꽃망울부터 먼저 터뜨리거나, 새로운 움을 틔우기도 전에 꽃부터 피우는 것은 예의가 아닌 법이다. 꽃이 피는 개화(開花) 시기와 속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자연의 섭리지만 봄꽃은 그런 자연의 법칙에서도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깊고 깊은 한 겨울에 슬며시 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봄의 전령사는 아마도 '붉디붉은' 동백 일 것이다. 제주도에서 피기 시작한 동백이 남도에 상륙할 때쯤이면 산수유가 바톤을 이어받는다.

봄꽃치고 새순을 내밀고 잎을 틔우는 순서를 다 지키면서 피는 꽃은 없다. 살구꽃도 사과꽃도 꽃부터 피우는 방식이 봄에는 허용되지 않던가. 진짜 봄은 화사하고 소담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순백의 '목련'이다.

매화 중에서도 곱디고운 자태로 한껏 치장한 '홍(紅)매화'는 봄비 촉촉이 내리는 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습성이 있다. 꽃샘추위 닥친 봄의 문턱 어느 날 봄비 촉촉이 내리던 그 날 '불국정토'의 도량, 불국사 입구에서 꽃망울 터뜨린 매화나무를 만났다.

바야흐로 개나리와 진달래가 온 산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봄의 절정, 클라이막스는 누가 뭐라고 해도 벚꽃이다.

대릉원을 산책하는 일본 여행객.
대릉원을 산책하는 일본 여행객.

◆대릉원의 봄

대릉원에도 일찌감치 봄이 왔다. 대릉원내 가장 커다란 고분인 황남대총 뒤편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목련이 피었다. 미세먼지 가시지 않은 변덕스런 봄날에 대릉원 '포토존'으로 유명해진 목련나무가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겨울에도 겨울대로 고고한 자태를 뽐내던 목련은 꽃을 피운 후에는 경주여행 '인증샷'을 찍으려는 여행객들로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을 이뤘다.

경주여행의 백미는 불국사도 첨성대도 동궁과 월지 혹은 폐허의 황룡사와 월성도 아닌 대릉원이다. 천년고도 신라는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 '고분도시'다. 죽은 왕의 유적이 동시대의 삶과 공존하는 도시가 경주다. 왕릉의 고분들은 세월의 흔적과 더불어 서서히 봉분이 깎이고 때로는 무덤이라는 흔적도 사라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경주는 수백여기의 고분이 남아있는 천년왕국의 수도였다. 그래서 경주여행의 백미 중의 백미는 신라초기의 고분군인 대릉원이라는 것이다.

대릉원
대릉원 '포토존'으로 유명해진 목련나무가 활짝 꽃망울을 터뜨리자 관광객들이 사진촬영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대릉원은 그래서 신라의 봄을 상징하기도 한다.

초대 왕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남해 차차웅, 유리, 탈해, 파사 이사금 등 이사금시대를 '신화의 시간'이라고 규정한다면 17대인 내물왕부터 시작되는 '마립간'(麻立干)시대는 그전 시대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신라왕권이 강화된 시기이자 '김씨 왕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거서간과 차차웅 그리고 이사금이라는 왕의 칭호와 달리 마립간은 으뜸 중의 으뜸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경주에 봄이 찾아왔다.대릉원주변 곳곳에는 봄을 알리는 목련이 만개했다.
경주에 봄이 찾아왔다.대릉원주변 곳곳에는 봄을 알리는 목련이 만개했다.

'마립'은 마루(으뜸)라는 뜻으로 마립간은 으뜸이 되는 우두머리(干)라는 것이다.마립간 시대가 그 전과 다른 것은 신라가 국가로서의 체계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한 시기와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박혁거세와 석탈해왕 등 신라초기에는 박씨와 석씨가 번갈아가면서 왕권을 차지했다. 박씨(朴氏)와 석씨(昔氏) 두 세력 모두 6부촌을 대표하거나 토착세력이 아닌 외부에서 유입된 집단이었다. 여기에 '계림' 신화의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 집단이 가세했다. 김씨로서 신라왕이 처음 등장한 것은 미추 이사금이다.

그는 석씨 왕인 첨해 이사금(12대)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어받았다. 김씨 세력이 왕권을 잡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추왕 다음에는 다시 석씨인 유례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남해 차차웅의 사위인 탈해가 유리 이사금에 이어 왕권을 차지했다가 다시 박씨로 왕권을 넘겨준 것과 마찬가지다.

◆대릉원 고분군은 '미추왕릉'을 조성하면서부터

대릉원의 고분군은 '미추왕릉'을 조성하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추왕릉과 천마총 그리고 황남대총 등의 거대한 고분군에 담장이 둘러쳐지고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미추왕을 장사지내면서 <삼국사기>에 '대릉(大陵)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미추왕릉은 대릉원내 고분 중에서 유일하게 담장으로 이중 보호되고 있어 신라시대에도 유달리 신성시되는 왕릉이었던 모양이다.

황남대총 주변에 개나리가 만개해 경주의 봄을 알리고 있다.
황남대총 주변에 개나리가 만개해 경주의 봄을 알리고 있다.

후대의 김씨 왕조 입장에서는 최초의 김씨 왕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왕으로서도 박씨와 석씨 왕들과는 달리 백성들의 존경을 듬뿍 받은 모양이다. 순행(巡行)을 통해 고령자와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등 백성들의 아픔을 달랬고 농사에 방해되는 것들을 없애고 대사면을 하고 궁궐을 고치자고 해도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못하게 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박씨와 석씨 왕들과는 다른 면모가 각인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죽어서도 음병(陰兵)을 보내 나라를 지키고 김유신 장군의 후손들의 원혼을 달래주기도 하는 등 호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미추왕의 무덤을 선대 왕릉보다 더 크게 조성한 것은 미추왕의 후손들이다. 미추왕에 이어 김씨로서 왕권를 두 번째로 이어받아 김씨 왕조를 확립한 것은 내물 마립간(17대)이다.

미추왕 사후 72년 만에 마침내 김씨 왕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통일신라 말기까지 경주 김씨가 '성골'과 '진골'로 왕권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마립간의 시대가 시작되자 왕들은 거서간과 이사금보다 더 강한 왕권을 과시하려는 뜻에서 의식적으로 초기 왕릉보다 더 큰 봉분을 조성한 것이다.

박혁거세를 비롯한 초기 4명의 왕과 왕비를 모신 오릉, 뿔뿔이 흩어져있는 지마왕릉 등 이사금 시대의 왕릉에 비해 대릉원 조성이후의 왕릉이 더 커진 것은 그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씨와 석씨 왕조때보다 더 강화된 김씨 왕권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이제 박씨와 석씨, 김씨 세력간 더 이상의 왕권 경쟁도 사라졌다.

미추왕릉의 담장에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곱게 피었다.
미추왕릉의 담장에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곱게 피었다.

◆봄의 절정

대릉원에 들어가면 곧바로 만나는 왕릉이 미추왕릉이다. 미추왕릉의 담장에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곱게 피었다. 천년의 시간 동안 꽃이 피고지는 자연의 섭리가 무한 반복되고 있을 테지만 천년의 역사를 봄꽃으로 맞이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바야흐로 왕의 무덤인 '대릉원'으로 부터 신라의 봄이 시작된 것이다.

대릉원에서도 가장 큰 고분인 황남대총과 천마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두 고분 모두 발굴하면서 금관과 수많은 부장품이 출토되면서 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누구의 무덤인지 특정할 수 있는 부장품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릉이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고분인 것처럼 대릉원이 김씨 왕들의 무덤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대릉'은 말 그대로 왕들의 우두머리인 '마립간'들의 무덤이라는 셈이다. 그래서 황남대총과 천마총. 황남대총이 함께 있는 대릉원은 경주 시내 산재한 다른 고분들과는 격이 다른 느낌을 준다. 대릉원과 4차선 도로를 마주하고 붙어있는 '노서· 노동리' 고분군 역시 대릉원과 궤를 같이 한다.

천마도
천마도

대릉원에서 가장 큰 고분이 황남대총이다. 이 고분은 특이하게도 표주박모양이다. 북쪽보다 남쪽 봉분이 더 크다. 남북으로 120m 동서로 80m에 이른다. 그래서 봉분이 높은 남분은 왕이, 북분에는 왕비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됐고 실제 남분에선 남성의 부장품이, 북분에서는 여성의 부장품이 대거 발굴됐고 금관도 출토됐다.

이 대릉원에서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고분이 '천마총'이다. 천마총은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을 비상하며 나아가는 듯 힘찬 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말의 입에서는 불같은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갈기에는 날개가, 머리에는 뿔이 있다.

노서·노동리 고분군은 금관이 처음 출토된 금관총과 봉황대, 서봉황총 등이 있는데다 대릉원 같은 담장이 없어 언제나 고분사이로 산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경주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예로부터 "왕의 무덤을 참배하면 상서로운 '서기'(瑞氣)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신들의 놀이터이기도 한 왕릉 사이를 천천히 거닐다보면 신라 천년의 역사가 생각나기도 하고 그 역사를 통해 신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왕들의 고뇌와 동시대 백성들의 삶과의 갈등도 기억하게 된다.

그래도 우리가 대릉원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천년역사를 기억해주는 듯한 황남대총 사이의 '목련나무' 포토존이다. 대릉원은 한 시대, 아니 천년 동안의 흥망성쇠를 기억하는 아이콘이다. 그 목련 꽃잎이 봄비를 맞아 뚝뚝 떨어졌다. 신라의 봄도 그렇게 절정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황리단길'이 대릉원 담장에 기댄채, MZ세대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어쩌면 신라의 봄을 연 왕들의 무덤이 그곳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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