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풍운아 긍석(肯石)을 아시나요? 석재(石齋) 서병오 선생의 수제자임에도 인지도가 낮아도 너무 낮다. 그의 삶 역시 다시 평가되어야 할 만큼 드라마틱하고 당시로서는 나라의 독립을 향한 독한 정신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오늘 만나게 될 인터뷰의 주인공은 이미 오래 전 고인(故人)이 된 긍석 김진만 선생이다. 취재 도중 든 생각은 지금이라도 달성공원 내 석재 서병오와 죽농(竹農) 서동균 선생의 비석에 긍석도 함께 들어가면 어떨까? 꼭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사자(死者) 인터뷰에 의미를 부여해본다.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난 독립운동가
조선 말인 1876년 대구시 남성정 622-1번지, 아버지 김재양과 어머니 이춘옥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의 나이에 사서삼경과 경전으로 학업에 정진했으며, 1888년 만 12세의 나이에 당시 대구의 큰 부잣집 딸인 서우순(徐佑淳)의 딸과 결혼해 슬하에 4남3녀를 둔다. 그의 평화롭던 삶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가정을 버린 '비장한 풍운아'의 삶으로 내몰린다.
1915년, 당시 39세이던 긍석은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에 입회한 후 앞산 안일사에서 회동을 한 후 조선국권회복단에도 가입한다. 이 때부터, 그는 한 가정을 지키는 가장이 아닌 나라를 구하기 위한 독립투사,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 독립운동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야심한 밤 장인(서우순)의 집에 권총을 들고 무장강도가 되어 침입하는 일명 '대구 권총사건'을 일으킨다.
◆장인 집을 털러 간 '대구 권총사건'
대한광복회에 가입한 후 오로지 나라를 구하는 일에만 전념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기로 각오했다. 1년 후 긍석이 일으킨 이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장인 집을 털 생각을?"
당시 사건을 유추해 보건데, 긍석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장인에게 여러 차례 재산의 일부를 내달라고 협박같은 요청(?)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인이 이를 받아들이자 않자, 그는 장인의 집에 무장강도가 되어 처들어갔다. 당시 기록을 보면, 동생 김진우와 정운일, 최병규, 임병하, 권국필 등이 야밤 기습작전으로 들어가 집사 우도길에게 권총을 발사해 중상을 입혔다. 하지만 재산 일부를 가져오는데도 실패했을 뿐 아니라 일본 경찰에 전원 붙잡혔다.
◆징역 10년의 옥살이, 비극적인 가정사
당시 대구지방법원은 긍석에게 10년을 언도했다. 더불어 공범인 동생 김진우 징역 12년, 행동대원 정운상·최병규 10년, 최준명 2년, 박상진·김재열 6개월, 홍주일 5개월, 이시영 4개월을 선고했다.
옥살이 도중에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아들 3형제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이 중 둘째 영우는 광복단원으로 붙잡혀 31세의 어린 나이에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셋째 영기는 일본 총영사관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이등방문) 피살에 가감해 하얼빈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긍석의 가정은 독립운동으로 인해 철저하게 파탄에 이르렀다. 자신이 옥중에 있는 동안 아들 셋이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처가가 대구 최고 부잣집으로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은 장인집에 무장강도로 돌변해 처들어가는 애국 도둑(?)이 되는 아이러니한 사건마저 일으켰다.
◆출소 후 소담했던 3년의 삶 '시서화'(詩書畵)
며칠 전 긍석에 다시 뉴스에 회자됐다. 대구미술관이 소장하는 일부 고서화에 대해 위작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대구미술관이 감정 평가를 통해 해당 작품의 진위 여부 조사에 착수한 것. 대구미술관은 21일 "최근 감정평가 기관 등에 의뢰해 석재 서병오와 긍석 김진만의 작품 1점씩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긍석은 54세의 나이에 대구형무소에서 출감됐다. 그는 석재 서병오의 16명 제자 중 수제자로 교남서화회에 참여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동화사 사적비에 해서로 휘호를 썼을 뿐만 아니라 부인사, 해인사, 통도사 등 유명 명승고적에도 수많은 현판에 필적으로 남기기도 했다. 현재 긍석의 작품 중 시 1편, 서예 1편이 남아있으며, 그림은 수십편이 발견되고 있다. 많지 않은 작품이기에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위작 논란마저 일어나고 있다.
긍석이 출소 후 시서화를 남긴 시기는 고작 3년. 그는 1933년 57세의 나이로 대구시 남산정 사저에서 영면했다. 긍석의 후손들(증손녀)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증조 할아버지에 대한 유품도 없을 뿐더러, 잊힌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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