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희숙 칼럼] 노동개혁, 천천히 서둘러야

윤희숙 전 국회의원

윤희숙 전 국회의원

정부가 근로시간을 주 69시간으로 늘리려 획책하고 있다는 뉴스가 범람하고 있다. 일부 언론은 작정한 듯 가짜 뉴스나 부정확한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반박 보도자료를 내거나 기사 수정을 요청하는 데 진력하고 있지만 역부족 같다.

정말 이 난리통을 만들 정도로 과격한 변화를 정부가 시도하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더 이상 1주일 단위로 근로시간을 규제하지 않겠다는 이번 발표는 사업장마다 사정이 다르니 정부가 획일적인 고삐를 죄지 않겠다는 것뿐이다.

게다가 이것은 이미 8년 전에 노사정이 함께 추진하겠다고 합의한 내용이다. 2015년 당시에도 이미 주 단위 근로시간 규제가 글로벌 스탠더드로부터 너무나 뒤처졌다는 공감대가 컸기 때문이다. 근로자 건강권에 엄격하기로 유명한 독일이나 네덜란드 같은 국가들에서도 주간 근로시간 규제라는 개념 자체가 소멸돼 왔다. 6개월이나 1년간 하루 8시간이라는 평균을 지키면 될 뿐 때때로 넘치는 것을 용인하고 추후 그만큼 쉬게 하는 방식이다. 이는 기업 간 차이를 반영한 탄력적 제도 없이는 변화무쌍한 시장에 대처할 수 없다는 고민 속에서, 기업 경쟁력과 근로자 보호를 모두 잡으려는 최선의 방식이라 알려져 있다.

물론 그 바탕은 정부가 아닌 노사가 함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토양인데, 이는 우리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정부만 구워삶아 그 뒤에 숨으면 된다는 우리나라 노사의 뿌리 깊은 구습, 시장을 내려다보고 호령하길 즐기는 정부에서 벗어나야 미래지향적이고 성숙한 노사관계가 가능해진다. 사실 서구 선진국처럼 정부는 근로자 건강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휴식시간처럼 큰 틀을 제시하고 그 준수 여부를 감독할 뿐, 구체적 방식은 현장의 노사가 어른답게 협의하고 타협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어지간한 나라들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내용이 왜 이런 반발을 초래했을까? 진영 논리에 매몰된 언론 환경도 문제고, 문재인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을 급발진해 버린 바람에 그때 병행됐어야 하는 유연성 조치들이 이제는 개악처럼 느껴지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정부가 자인한 홍보 실패 역시 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근본적 원인은 따로 있다. 현장을 생생하게 파악해 논거를 탄탄히 하는 '경청 기반 소통' 부족이 그것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가 주 52시간제를 급격하고 획일적으로 단행했을 때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일감이 특정 시기에 몰리거나 만성적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중소기업, 그리고 잔업수당이 생계에 절실했던 저임금근로자들이었다. 공장 문을 닫을 지경이라는 기업들의 호소와 일찍 퇴근하는 대신 투잡을 뛰게 됐다는 근로자들의 하소연이 얼마나 안타까웠나. 저녁이 있는 삶보다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삶을 원한다는 절규가 지금도 간절한지 확인해 국민의 공감을 얻어냈어야 했다.

반면 대기업과 공공 부문의 사무직,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 근로자들은 주 52시간제 덕분에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하는 만족한 그룹이다. 정부가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라 해봤자 별 매력도 못 느낀다. 더구나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정규직이나 비정규직 모두 열심히 일했으니 오래 쉬다 오라 할 만큼 쿨한 사장님을 만난 적이 없다며 '제주도 한 달 살이 홍보'를 탁상행정이라 냉소한다. 근로자 대표의 선출 절차를 법제화할 테니 사용자와 제대로 협상할 수 있게 된다, 야근할지 말지 각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하겠다라고 정부가 아무리 장담해도 소용없다. 그간 경험한 일터의 문화가 고압적이고 수직적인데 어쩌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불만들을 최종 입법예고 단계에 와서야 정부가 인지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한 일이 안 풀리니 정부도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제도가 경쟁국들보다 경직적이고 낙후됐다 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맬 수는 없다. 노사의 대등한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근로자들이 변화를 겁내는 한 어떤 비전도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그러니 차라리 이참에 근로자 대표를 대충 세워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해 온 관행부터 확실히 뜯어고치고 제대로 법제화하자. 어차피 근로시간 말고도 근로자 대표가 사용자와 결정하도록 돼 있는 근로기준 사항이 30개가 넘는다. 여기서부터 노사 자율 협상의 관행과 신뢰가 제대로 뿌리내린다면 그게 바로 노동 개혁의 핵심이고, 더한 변화를 가능케 할 기반이다. 길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할 뿐, 천천히 서두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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