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26> 이미지의 음악, 라벨(1875-1937)의 거울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인상파 이미지. 서영처 교수 제공
인상파 이미지. 서영처 교수 제공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 시인.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 시인.

이미지즘은 시각적 심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심상(心象)은 감각적 형상이 마음에 재생되는 것, 감각경험의 모사를 말한다. 시각적 심상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묘사와 비슷하지만 대상을 의미화하지 않고 이미지 그 자체를 그린다는 점에서 묘사와 다르다. 음악의 인상주의는 미술의 인상주의와 마찬가지로 대상에 머무는 빛과 그림자, 색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려준다.

라벨의 <거울>은 5개의 소품으로 이루어진 피아노곡이다. '나방' '슬픈 새' '바다 위의 작은 배'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골짜기의 종'으로 구성되어 청명한 소리를 들려준다. 이 곡들은 대상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피아니스틱한 효과로 수많은 연주자와 청중들에게 사랑받는 곡이다. 라벨은 <거울>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을 구체화하며 파닥거리는 생명의 현재를 노래한다. 그리고 대상을 거울처럼 명징하게 읽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나방'은 여름 저녁, 마른 잎사귀 같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의 날갯짓을 들려준다. 나방은 불빛이 환한 창 안의 세계를 동경한다. 안은 닫힌 공간이지만 굴광성의 나방은 창을 두드리며 기어이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슬픔에 지친 나방은 몸을 밀착하고 온 힘을 다해 창을 두드린다.

'슬픈 새'는 죽어가는 새를 그린다. 남은 힘을 다해 생을 향해 발버둥 치는 새, 라벨은 가녀린 죽지를 간헐적으로 파닥거리는 애처로운 새의 모습을 피아노의 반복음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피아노의 저음이 암시하듯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새의 숨은 끊어진다.

'바다 위의 작은 배'는 거세지는 파도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조각배를 그린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요동치는 배, 존재는 위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버둥 친다. 라벨은 밋밋한 시간이 아닌 용솟음치는 생명의 수직적 순간들을 포착한다.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는 오바드이다. 세레나데가 감성에 호소하는 밤의 노래라면 오바드는 상쾌한 아침의 노래이다.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는 밝고 리드미컬하다.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괴상한 표정을 한 광대들의 곡예. 그러나 이들의 과장된 몸짓과 웃음은 처연한 삶의 슬픔 속에서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라벨의 <거울>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골짜기의 종'은 끝없이 퍼져가는 종소리를 들려준다. 종소리는 골짜기에 부딪히며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이 연속적인 울림 위로 저녁노을이 펼쳐진다. 먼 골짜기가 종소리를 받아 먹고 깊어진다. 골짜기는 소리들이 잠드는 컴컴한 묘지가 된다.

라벨은 인상파 음악가답게 순간의 인상을 재현하고 끝없이 동요하는 대상의 움직임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추적한다. 그러나 드뷔시처럼 몽롱하지 않고 고전적이라 불릴 만큼 명징한 멜로디와 리듬을 선호한다. <거울>에 등장하는 대상은 힘없고 여린 존재들이다. 라벨은 이 가련한 존재들의 투쟁을 존중과 연민의 마음으로 관찰하고 표현한다. 그의 소품집 <거울> 속에는 이 존재들의 희로애락과 생사고락이 다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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