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파리 유학 시절 한국에 한번씩 들어오면 미술의 일번지라 불리는 서울 삼청동 갤러리들을 돌며 전시를 보러 다녔습니다. 내가 과연 언제 한번 저곳에서 전시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걸 이루는 데 딱 30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최근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주목 받는 중견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박종규(57) 작가다. 지난해 5월 국내 톱 갤러리로 손꼽히는 학고재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고, 전속 이후 첫 전시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있다.
특히 그의 전시는 학고재가 생긴 이후로 본관, 신관을 모두 쓰는 첫 전관 전시인데다 역대 최장 기간(45일)이다. 아트바젤 홍콩, 광주비엔날레 등 중요한 국제 미술행사들이 집중된 기간에 전시를 배치한 것도 의미가 남다르다. 이 기간 한국을 찾는 해외 미술 애호가들에게 작가를 알리기 위한 포석이란 게 학고재의 얘기다.
주말은 서울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맞고, 평일에는 대구에서 작업에 몰두한다는 그를 최근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의 작업실은 대구 서구 염색공단 내에 위치해있다. 겉으로 보기에 빼곡히 들어선 공장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까만 철제 구조의 건물인 데다 간판도 없어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는 "남구 대명동 집 바로 옆에 집을 하나 더 얻어 작업실로 썼는데 큰 작업을 많이 하다보니 공간이 좁았다. 2020년 새 작업실을 지어 옮겼다"며 "지금 전시 때문에 70여 점이 빠졌는데, 그 작품이 다 여기 있다고 하면 사실 넓은 것도 아니다. 큰 작업하는 작가들은 공감할 것"이라며 웃었다. 이어 "공장이 많지만 생각보다 시끄럽지 않고, 잠깐 바람 쐴 수 있는 마당도 있어 작업에 매진하기에 참 좋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박 작가는 대구에서 태어나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 한국인 최초로 수석 입학했고, 졸업 이후 귀국해 작업을 해왔다. 10여 년 전 미니멀리즘을 추종하던 시기, 막내 세대였던 그는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다 제거하는 미술 경향에 의문을 품었다.
"어쩌면 제거되고 배제된 대상 안에 미술적 가치나 희망은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됐죠. 모두가 아니다, 틀리다는 것이 정말 틀린걸까? 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것의 신호'를 나타내는 컴퓨터의 노이즈를 수집한 것도 그 이유다. 손상된 화면이나 잡음의 파장은 부정적인 가치지만, 그것들을 확대해 캔버스에 옮기면 때로는 쌓인 눈처럼, 꽃처럼 정연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그는 무엇보다 노이즈가 '휴머니즘의 잔존'을 뜻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신호를 포착한다. 그는 "컴퓨터에 노이즈가 발생한다는 것은 아직 휴머니즘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컴퓨터가 완전무결해질 때 인간은 로봇이 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배제되고 제거되는 것에 대한 의문은 다양한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기에 깊이를 더한다. 작가는 "맞다고 생각했던 게 정권이 바뀌면서 틀린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상대적으로 결핍이 있는 이들이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도 내 작업과 연결된다"며 "스스로 고민해 화두를 잡고, 수많은 방식으로 연결, 확장해 창작해나가는 역량이 작가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술사적으로도 그의 작업은 의미를 가진다. 디지털 기호를 가져온 그의 작품은 분명 시대의 현상과 문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 그는 "항상 미술은 어떤 사회적 현상이나 문제를 다뤄야한다고 생각한다"며 "컴퓨터가 발전할수록 인간성은 소멸된다. 그러한 부분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내 작업이 나중에 돌아보면 미술사적으로 꽤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마치 오려낸 스티커들을 붙인 듯 보이지만, 수없이 물감의 겹이 쌓인 흔적이다. 컴퓨터로 노이즈를 확대한 부분을 시트지에 인쇄한 뒤 캔버스에 붙이고, 잘려진 일부를 뜯어낸 뒤 그 위에 최소 15번 가량의 물감을 덧칠한다. 그렇게 쌓이는 레이어가 3~4겹. 물감이 번지거나 뜯어지거나, 부러지는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작업에 이르렀다.
그는 화업 30여 년을 맞은 지금 되돌아보니, 오로지 프랑스 현대미술 운동 '쉬포르 쉬르파스'를 이끈 클로드 비알라에게 배우고자 유학길에 올랐던 20대 때의 숱한 고민들이 결국 지금의 작업과도 연결돼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이어왔던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대한 사유, 새로운 회화의 돌파구를 찾는 시도를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막연히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만 그릴 수도 있지만, 작가라면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조리한 점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는 건 어쩌면 더 큰 개념의 아름다움이니까요. 그러한 작가의 태도를 지켜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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