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어머니 시집오신 길

조두진 논설위원
조두진 논설위원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 연세대 교수가 10년쯤 전 '그을린 예술'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는 '그을린 예술'이란 '천재라 불리는 작가의 예술이 아니고, 지상에 떨어진 타락한 천사의 예술이 아니고, 진리를 선포하거나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적 예술이 아니고, 순수예술도 아니다'고 했다. 그가 정의한 '그을린 예술'은 '한 개인이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 예술, 삶의 불길에 그을린 생활의 빛을 띠는 예술'이다.

소설 '개비리'는 평범한 직장인 김상숙 씨가 쓴 작품으로 '엄마의 이야기가 책이 되었습니다'는 부제를 달고 있다. 작가가 듣고 보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자기 어머니의 삶을 담담하게 서술한 내용이다. '개비리'는 작가의 어머니가 시집올 때 넘어온 절벽길 이름으로, 작가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이다.

소설 '개비리'는 80대 노모에게 바치는 자식의 헌사이자, 험한 세상을 살아내느라 모질어진 나와 내 형제자매들의 티 없고 철없었던 시절 추억을 담은 작품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어머니가 계신다는 사실, 형제자매들이 자기 입장을 내세우며 각자의 길을 가지만 한 분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자랐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개비리'에는 문학적 장치도, 긴장감과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한 구성적 배열도 없다.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듯이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를, 어머니 편에서, 그리고 형제자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썼기에 극적인 사건이나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구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밋밋한 소설을 읽은 작가의 형제자매들은 폭풍처럼 오열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 지나 없어진 줄 알았던 '내 어머니의 삶'을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설 '개비리'를 자비로 200권 찍어 형제자매들과 가까운 친구들끼리만 읽었다고 한다. 낯모르는 사람들에게야 어떻든,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개비리'는 문학적 완성도가 탁월한 작품이다. 깊은 감동을 받고 화해의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다. 생활을 예술로, 예술을 생활로 만든 것이다. 심보선이 말한 '그을린 예술'이 이런 것 아닐까. 독자들께서도 올 한 해 '생활 예술인'이 되어 보시라고 강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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