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흙냄새를 캐 올린다. 너무 오랜만에 내리는 비가 반가워 창을 열고 한껏 냄새를 들이켠다. 겨울 가뭄이 심했던 탓에 저 약한 빗줄기로는 여간해서 해갈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어느새 나무에 생기가 돈다.
안간힘으로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떨쳐버리고 나면 가벼워진다는 걸 알지만, 그것들이 내 삶을 지탱하고 있어서 잠시라도 놓치면 끝을 볼 것만 같아 불안했다.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불러 덩치를 키웠다. 통제할 수 없는 삶 위에서 나는 출렁거리고 위태로웠지만, 내려올 방법을 알지 못했다. 불안은 결핍에서 비롯하는 것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내 결핍은 한정 없었다.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는 일상에 권태가 느껴졌다. 숨 가쁜 일상에서 조금만 게을러 보면, 한 발만 벗어나 보면, 하루만 고독해 보면 삶의 질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도시의 삶에서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기적처럼 시골에서 살 기회를 얻었다. 촘촘한 그물망에서 구출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습관은 질긴 법이어서 한가한 시간이 불안을 몰고 오곤 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끌려 종류를 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작물을 심고 풀 뽑기에 매달리며 부지런 떨었다.
그 모습이 어설프고 불안해보였던지 이웃 할머니가 은근히 만류하셨다.
"아직 작물이 어린데 자꾸 흙을 밟고 다니면 뿌리가 실해지지 못혀. 농작물이 주인 발걸음 소리 듣고 큰다지만 그것도 다 때가 있는 게야."
할머니 말씀이 옳았다. 두 가지를 심으면 두 가지 근심이고 열 가지를 심으면 열 가지 근심이라더니!
시골의 시간은 느리고, 차분하고, 느슨하다. 바쁜 일이 수두룩하지만 강박적이지는 않다. 밭일하다 동네 분이 지나가면 손을 툭툭 털고 일어서 인사를 나눈다. 밭둑에 무질러 앉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조언을 받고, 그러다 일이 시들해지면 흙먼지 폴삭이는 밭고랑을 걸어 퇴근하면 그만이다.
몇 해가 지났어도 농사일이 어설프긴 마찬가지여서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꼭 한마디씩 거든다. 한 분은 좀 더 촘촘히 심어야 한다고, 다른 분은 너무 촘촘하다고. 그러니 어느 장단이 옳은지는 세월이 지나 봐야 알 일이다. 네~!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역시나 내키는 대로 심고 거둔다. 아무리 부지런 떨어도 이웃들의 반도 안 되는 수확량이지만 나름 뿌듯하여 직업을 물으면 농부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흙이 결핍을 거름으로 미성숙한 나를 키우는 덕이리라.
굵지 않은 빗줄기가 종일 같은 무게로 흙을 적신다. 흙냄새가 가라앉는 땅에 어느새 물기가 오른다. 풍년 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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